매일신문

미디어는 내친구-고교수업 활용

미디어가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됐다곤 하지만 학교 수업에서 이를 활용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나름대로 성과를 거뒀다고 하는 NIE(신문활용교육)조차 극히 일부 교사를 제외하면 학생들을 일방적인 수용자로 만들어 버리거나 시키기 좋은 숙제거리 정도로 치부된다.

신문도 쉽지 않은데 방송이나 컴퓨터 등 적잖은 준비가 필요한 미디어야 오죽할까. 교실 수업에서 미디어 활용의 사례를 찾아보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런데 마침 미디어교육연구회 김상중 교사(송현여고)가 이를 시도한다는 얘기가 들렸다.

지난 1일 오후 2시 송현여고 과학실을 찾았다. 2학년1반 학생들의 생물 수업 시간. 주제는 '창조론이냐 진화론이냐'였다. 우선 들여다본 과학실 안의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옆쪽으로 미술도구 이젤 위에 전시된 신문 형태의 A3 종이들. 자세히 들여다보니 신문이었다. 제호는 각각 '사노라면' '대낮토론' 'evolution'.

미처 읽어볼 사이도 없이 김 교사의 간단한 설명 후 모둠별 발표로 수업이 열렸다. 먼저 '사노라면' 모둠. 그런데 그 발표라는 게 마치 저녁 뉴스를 방불케 하는 형태였다. 앵커가 있고 기자가 있고, 실물화상기로 화면에 관련 자료가 뜨고. '진화-그것에 대해 알고 싶다' '진화론자 엿보기' '진화의 증거' 등 기획물이 잇따라 보도됐다. 진화론을 담은 책 평가, 진화론자 인터뷰 등은 물론 오늘의 날씨까지 방송 뉴스의 포맷을 따라잡고 있었다. 듣다 보니 전시된 신문은 학생들이 발표할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신문과 방송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발표였다.

모둠별 발표가 이어지면서 좀처럼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다음은 '대낮토론' 모둠. 전시된 신문 '대낮일보'는 진화론자들의 화석 조작과 진화론의 문제점, 창조론 해설에 사설과 광고까지 일반 신문과 다를 바 없는 솜씨를 보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막상 학생들의 발표는 방송 토론 프로그램 형태로 진행됐다. KBS 심야토론의 오프닝 음악을 배경으로 시작한 토론은 창조론과 진화론 주장자 각 3명 사이에 열띠게 벌어졌다. 토론 끝에는 시청자 전화를 받는 코너까지 코믹하게 보태졌다.

'evolution' 모둠은 신문을 방송 형태로 보도했다. 종이로 만든 TV 화면 앞에 앵커가 앉았다가 기자와 전문가, 앵커가 연신 화면을 들락거렸다. 포유류 진화를 뒷받침하는 어금니 발달에 대한 전문가 인터뷰에서부터 엘니뇨 피해가 심각한 갈라파고스 현장 취재 및 주민 인터뷰, 방주를 만든 노아와 다윈까지 화면은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진화론을 소재로 엮은 TV 프로그램과 독자토론, 만평까지 소개됐다.

마지막 모둠은 '박성근의 그것이 알고 싶다네'란 이름부터 뭔가를 예감케 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음악과 함께 문성근식 톤으로 목소리에 힘을 준 진행자가 등장했다. 박수와 함께 포복절도하는 학생들. 곧이어 교실 내 TV에 화면이 떴다. '황소가 바다에 빠져 고래가 된 사연'이란 꽁트. 진화론의 허점을 보여주는 내용으로, 모둠원들이 분장을 하고 소품도 써 가며 만든 것이었다. 친구들이 화면에 나왔다는 이유 만으로도 학생들은 쉴새없이 깔깔거렸다. 이어 종교부장 선생님 인터뷰에 파워포인트로 만든 자료까지 제시되는 동안에도 진행자 '박성근'은 특유의 톤을 잃지 않았다.

모둠별 발표가 끝난 뒤 서로 질문하고 답하는 시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기다렸다는 듯 진화론과 창조론을 주장하는 모둠 간에 질문과 대답, 반박이 꼬리를 물었다. 김 교사가 미처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해 수업 마칠 시간은 이미 넘어서고 있었다. 그야말로 학생들이 온전히 수업의 주인이 된 모습. 참으로 보고 싶었던 교실 풍경이었다.

사실 이날 수업에 건 기대는 제대로 된 미디어 활용 수업이 아니라 첫 시도에서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볼 수 있느냐는 거였다. 고교 2학년생이라고 하지만 과제를 준 기간도 고작 1주일이어서 큰 기대를 하기에도 무리. 하지만 수업이 끝난 후 김 교사와 수업을 참관한 다른 교사들이 내린 평가는 대만족이었다.

사실 신문 제작의 전문성이나 방송 촬영 기법, 자료 활용 방법 등 흠 잡을 만한 부분은 많았다. 그러나 교사들은 "중요한 건 미디어를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가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 수업 효과를 얼마나 높이느냐의 문제"라고 전제한 뒤 "미디어를 매개로 모든 학생이 어떻게든 수업에 참여하고 교과에 흥미를 갖는 모습은 참으로 고무적이었다"고 했다.

배울 내용을 신문이나 방송, 컴퓨터 파일 등 내가 좋아하는 형태로 만들어 보고 이를 친구들 앞에서 발표하는 수업. 어색하지만 진지함을 놓치지 않고 박수와 웃음 속에서도 주제를 벗어나지 않는 학생들. "수업이 늘 이렇게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오늘 배운 진화와 창조의 문제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수업이 끝난 후에도 학생들은 좀처럼 과학실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김재경기자 kj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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