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여보시오 벗님네들 이내소리 들어보소

(44)여성들의 꿈가한을 갈아내는 맷돌노래

'약방집 맷돌인가'. 어디에나 되는 대로 함부로 연장을 쓸 때 일컫는 옛말이다. 약방에서 약을 갈 때에 맷돌에다 이 약 저 약을 두루 갈았던 까닭에 이러한 옛말이 생겼다. 원래 맷돌은 밀이나 팥.콩.메밀 등을 가는 데 쓰이는 연모이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손잡이를 잡고 돌리며 맷돌 윗짝에 나 있는 구멍으로 곡물을 퍼 넣으면 잘게 바수어진 뒤에 맷돌짝 밖으로 흘러나온다. 맷돌에다 물에 불린 콩을 갈아서 두부를 만들기도 하고 녹두를 갈아서 청포를 만들기도 한다. 이제 가을걷이도 어느 정도 끝났으니 디딜방앗간과 맷돌이 제 구실을 할 차례이다.

맷돌 맷돌 맷돌아

뺑뺑 뺑뺑 니 돌아라

이놈의 팔자로 내삐리야 될낀데

자고 새고 맷돌에 앉아

이러그로 저러그로 갈아서

죽 한 그릇 얻어 묵을라고

이리 하는 팔자야 내 신세야

경남 의령 사는 정분자 할머니의 맷돌 노래이다. 맷돌의 기본 속성은 제자리에서 계속 뺑뺑 도는 것이다. 개미 쳇바퀴 돌듯 맷돌이 아무리 돌아봐도 항상 제자리에서 같은 일을 감당해야 한다. 달라지는 것도 없고 더 나아지는 법도 없다. 마치 자고 새면 맷돌에 앉아 줄곧 뭣인가를 갈아야 죽이라도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는 여인네의 고단한 삶을 보는 것 같다. 늘 뺑뺑 돌기만 하는 팔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가 하도 안타까운 나머지 맷돌의 처지에 견주어 노래한 일종의 넋두리이자 신세타령이다.

오∼에해∼라 맷돌

어∼에해∼라 맷돌

산지조종은 곤륜산이요

수지조종은 황해술래

우리 일꾼 이 매를 갈어

곡자를 맨들어서 술을 비여

취케 먹고 맷돌을 가세

전남 함평 정정암 할아버지의 맷돌질 소리이다. 앞의 노래는 혼자서 맷돌질을 하며 부르는 신세타령이었는데, 이 노래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맷돌을 돌리니 한 사람은 앞소리를 매기고 다른 사람은 '어∼에해∼라 맷돌'이라 하며 뒷소리를 받아 주고 받으면서 불렀으므로 노래의 가락도 제법 흥겹다. 마치 집터나 다지며 지신밟기나 하듯이 산지조종과 수지조종까지 들먹인다.

앞소리꾼은 일을 거드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어서 일을 격려할 필요가 있다. 우리 일꾼이라고 감싸안으면서 이 맷돌로 밀을 갈아서 곡자, 곧 밀기울로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어 취하게 먹자고 한다. 술을 취하도록 마시고 뭘 할 것인가. 술 마시고 다시 맷돌을 갈잔다. 맷돌을 갈아 술 빚어 마시고 다시 맷돌을 갈자는 노래이니, 이야말로 계속 제자리 돌림만 하는 맷돌의 운명이 아닌가.

이 매를 얼른 갈아

기울은 빼서 누룩 딛고

이 누룩 디뎌서 무얼 헐게

첫째로는 선영 봉지사

둣째로는 농주로 뜨네

얼른얼른 갈아 가지고

가리는 떠서 죽을 먹제

맷돌소리를 어울러보세

이 노래를 자조 하먼

이웃집 큰애기 바람나네

함평 사는 정기덕 어른의 소리이다. 맷돌을 갈아 누룩을 만드는 과정은 앞의 노래와 같다. 누룩고리에다 '누룩을 디뎌서' 만드는 과정이 강조된 정도이다. 그러나 술의 쓰임새는 한층 적극적이다. 누룩으로 술을 빚어 조상께 제주로 올리고 농사일을 할 때 농주로도 쓰겠다고 한다. 게다가 밀가루는 별도로 떠서 죽을 쑤어 먹겠단다. 살림살이를 알뜰하게 하는 정성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나저나 맷돌소리 자주하면 이웃집 큰애기 바람난다는 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 맷돌의 구조와 형상이 가지고 있는 성적 상징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맷돌로 무엇을 갈 때에는 암수가 짝을 이루어 아래위를 맞추어 결합될 뿐 아니라, 위짝 구멍에 곡물을 넣어서 돌리면 맷돌짝 사이로 희고 걸쭉한 물이 흘러넘치게 된다. 따라서 성적으로 민감한 처녀들이 이런 상황을 자주 보게 되면 바람난다고 걱정을 하는 셈인데, 정말 그럴까. 남정네들이 자기 마음만 여기고 괜한 걱정을 사서 하는 꼴이다.

나는 가네 나는 가네

저 임 따라 나는 가네

돌아가네 돌아가네

우리 맷독 돌아를 간다

임아임아 엇그저께 만난 임아

갑작시럽게 등 돌아서냐

가세 가세 산노물 가세

바구리 옆에 찌고 산노물 가세

언제라고 좋다고 하더니

요 방정맞은 년 다른 놈 두었네

진도 사는 설재천.설국전 할아버지의 앞소리이다. 뒷소리는 '어∼기야∼하∼라 허∼허허허요'와 같이 상당히 늘어진다. 맷돌이 돌아가는 형상을, 사랑하는 님이 서로 돌아서는 상황에다 견주어 노래한다. 오랫동안 사귀던 님을 두고 다른 님을 따라 가는 님과, 이를 두고 원망하는 님이 서로 처지를 바꾸어 주고받는 노래이다. '가네 가네 나는 가네/ 저 님을 따라 나는 가네' 또는 '가세 가세 산나물 하러 가세/ 바구니 옆에 끼고 산나물 하러 가세' 하고 노래하는 주체는 다른 님을 따라나서는 여성이라면, '님아 님아 엇그저께 만난 님아/ 갑작스레 돌아서냐' 또는 '언제든지 좋다고만 하더니/ 요 방정맞은 년 다른 놈 두었구나' 하는 노래의 주체는 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남성인 셈이다. 요즘 여야간의 권력이동을 보면 이와 다르지 않다. 벌써 방정맞은 일부 관료들은 여당에 등돌리기를 하고 야당 쪽에 줄서기를 하는 모양이다.

엄매 엄매 우리 엄매

오랍시 장가는 내 작년에 보내고

거멍소 폴아 갖고

날 머여 여워를 주게

노래의 주체가 시집 못간 큰애기로 바뀌었다. 올아버니 장가는 내년에 보내고 검둥소 팔아서 날 먼저 시집보내 달라고 졸라댄다. 요즘 여당의 대권주자들 꼴이다. 국정쇄신보다 대선후보를 먼저 가시화해야 한다고 대통령을 압박하는 이들은 마치 국정 수습보다 차기 집권에 눈이 어두운 셈이다. 집구석이야 망하든 말든 검둥소라도 팔아서 오라비 제쳐두고 나부터 먼저 시집가겠다고 나서는 철모르는 딸이나 그리 다르지 않다.

시아제비도 말 몬하고

시어머니도 불측하네

시아버지는 노름방에

밤새도록 쪼아봐도

흑싸리쭉정만 올라오고

두부공장만 남았구나

의령 사는 강순남 아주머니의 맷돌노래 일부이다. 시집을 갔더니 시아제비도 말 못할 정도로 흉측하고 시어머니도 불측(不測)하기 짝이 없다. 더군다나 시아버지는 아예 노름방에서 밤을 새운다. 밤새도록 화투짝을 들고 쪼아봐도 흑싸리 쭉정이만 올라오니 볼장 다 봤다는 말이다. 결국 두부공장만 남았다는데, 이때 두부공장은 집구석이 엉망진창인 콩가루집안이라는 말이다.

지금 김대중 정권의 처지가 사실상 두부공장이나 다름없다. 대통령이 거듭되는 국정개혁 요구를 외면하다가 마침내 재보선 패배를 계기로 여당은 쇄신파동과 함께 내분의 소용돌이에 빠져버린 상태이다. 여당 내부의 권력투쟁으로부터 대통령의 권력누수가 촉발되고, 김대중 정권의 무능이 마침내 '호남정권 독식'이니 '전라도 사람들끼리 다 해먹었다'는 막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역사적인 정권교체로 전라도 민중들의 한을 풀어주리라 믿었던 김대중 정권이 이제 전라도 사람들의 긍지를 훼손하고 마침내 그들을 남세스럽게 만들고 있다니 안타깝다. 준비된 대통령에 기대를 걸었던 지지자들의 실망 또한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준비가 덜 됐더라도 좋다. 새로 준비하는 각오로 정치혁신의 결단을 내려야 할 때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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