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시론-거기 현명한 스승이 있다

삶이 답답하면 요즘은 산에 가 볼일이다. 체력 단련이라든가 운동의 개념을 벗어나서 담담하고 느린 걸음의 산책기분으로 가까운 산이라도 가 볼일이다.

그곳이 낮은 산이라 하더라도 몇 걸음만 산을 향해 올라가노라면 유명한 건축가가 지은 신세계의 세련된 구조의 건축물을 보는 거와는 또 다른 감동이 마음 안에 빛살무늬를 그으며 다가 올 것이 분명하다.

산이라는 것은 누가 애써 가꾸는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이 매번 가꾸는 정원보다 더 구성지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정감이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아무렇게나 서 있는 나무들의 조화와 그들이 계절마다 보여주는 모습에서 감탄이 절로 나오게 되는 것은 아마도 자연만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내적 여유 때문이 아닌가 한다.

겨울이 저만치 보이는 늦가을 산에서 바라보는 나무들은 마치 한국의 전통 가옥의 반 투시형의 창호지 문으로 바라보는 완충지대처럼 가까이에서도 먼 것처럼 멀리서도 가까운 것 같은 정신적인 거리감을 갖게되는 것이다. 마치 친한 벗을 만난 것 같은 편안함이 가을 산 나무에게는 있는 것이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나무를 화폐기능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옛날 우리의 선조 들은 동물뿐 아니라 식물도 의인화해서 정(情)의 투사 대상으로 삼았다. 하늘에 나의 별이 있다고 믿으려는 그 관계 희망의 진한 정은 산에는 내나무가 있다고 믿은 것은 참으로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그래서 옛 아버지들은 딸을 낳으면 딸의 나무로 오동을 심어 시집갈 때 농으로 짜 주고 아들 나무는 관목으로 삼았지 않았는가. 그래서 현세와 내세를 잇는 영원불멸의사상을 하나의 '내 나무'로 삼았던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국운이 기울면 우는 나무도 있었고 국운에 힘이 오르면 웃는 나무도 있었다는 전설은 얼마든지 있다. 더욱 서울 회현동어느 은행나무는 임진왜란때 도끼로 찍으려 하자 피를 흘렸다는 애국나무도 있다는 설이 전해 온다.

나무는 인간과 한 가족의 의미를 가지고 오늘 현대의 첨단 과학이 다시 새로운 과학을 만들어 내고 있는 현실에서도 그 첨단의 과학보다 더 인간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나무들을 만나는 것이다.

특히 계절마다 나무들은 그저 그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는 스승으로 우뚝 서 있는 것을 본다. 계절마다 나무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형용사를 줄이고 정제된 언어로 살아가는 법을 말하지만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마도 나무는 인간처럼 미련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무는 다시 몸소 보여 준다. 가을 나무는 이제 소임을 다 끝냈다. 잎이 더욱 그러하다. 꽃처럼 사랑도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한 잎이지만 줄기를 따라 여름의 뙈약볕을 견디고 그 수분을 열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는 이제는 쓸모 없다는 생각일까. 생명의 불을 끄고 메마른 모습으로 고요히 떨어지는 겸손을 자처하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낙엽이라고 말하지만 가을 산에서 바라보라. 그 낙엽들은 또하나의 소임을 성직처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낙엽이불이라고 하면 될까. 낙엽들은 우수수 떨어져 겨울의 발 시린 나무뿌리들을 덮어 주려고 마지막 선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낙엽이불이 솜보다 더 따뜻하게 보이는 것은 그 이불 위에 한번쯤 딩굴고 싶은 응석을 부리고 싶은 것은 그 정경이 너무나 엄숙하면서 다정한 인간적 모성의 아름다움이 베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을 그렇듯 온전히 수용하면서 내가 가진 마지막 헌신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나무들 앞에서 사람은 그저 말이 없을 뿐이다.

우리 인간사도 사실은 이런 마지막 미학이 절실할 때가 아닌가. 그렇다. 사람들도 마지막 모습에서 그 인간의 진가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신달자-시인·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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