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 에세이-내 고향은 사람들사이에 있다

본향은 상주, 출생지는 안동, 성장지는 대구…. 이것이 나의 중심 이력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대답을 망설이는 버릇이 내게 있다. 특히 문예지에서 요구하는 짧은 자술 이력서에는 출생지 항목은 있어도 성장지 항목이 없기 마련이어서, 내가 출생지를 밝히지 않고 '대구에서 성장'이라고만 쓰는데도 나중에 인쇄된 책을 보면 '대구 출생'으로 나와 있곤 한다. 사전에서는 고향이 "태어나 자란 곳", "조상 때부터 오래 누리어 살던 곳"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나는 조상들이 신라 시대 부터 살아온 상주와 태어나서 젖먹이 시절을 보낸 안동과 안동에서 의성을 거쳐 나와 네댓 살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자란 대구가 모두 고향이라는 걸까, 그 어디도 고향이 아니라는 말일까. 사실은 이게 불만도 뭐도 아니다.

내 성장 과정과 관련해서 내가 좀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 삶의 전반기가 이렇듯 대구를 거점으로 해서 경북 내륙의 중부 쪽으로 걸친 지역에서 피와 살을 받으며 형성되었음에도 그 시절 우리 세대라면 누구나 겪었을 '농경사회적 체험'이 전무하다는 사실에 있다. 모내기 한번 해본 적 없고, 밭에 거름 한번 준 적 없고, 도랑 치고 가재 잡은 적 없다. 노란 꽃이면 다 개나리, 붉은 빛이면 모두 장미, 이런 식이니까, 도시 아이들에 대해 비웃을 때 "쌀나무, 보리나무" 하는 놀림말이 일찌감치 나 같은 사람을 향한 것이어야 했던 셈이다. 게다가, 나름대로 이사 체험은 있으니 지리적인 분별력은 좀 있음직한데도, 그 지역의 산이나 절, 명승고적이나 유원지에 대해서도 거의 기억해 내지 못한다.

이 까닭에, 자연을 알지 못하고, 자라난 고향에 대해 묘사할 수 없다면 그게 어디 문학하는 사람이랄 수 있을까 하고 자문한 적이 많다. 내 아무리 '도시 시'를 씁네, 도시적 환경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주인공을 내세웁네 해도, 아파트 베란다의 화분에서 자라는 꽃의 생태쯤은 짐작해야 하고, 주인공이 차를 몰고 달리는 시골길에 푸르게 자라는 식물들이 '쌀나무'인지 '보리나무'인지는 알아야 했던 것이다. 애인에게 바치는 꽃 한 송이에 정성이 그득 담기려면 그게 무슨 꽃인지는 알아야 하는데, 작가로서 그걸 모르니까 그저 투박하고 말없는 사나이만을 그려 놓기 일쑤다. 하지만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자연'이 없고 '고향의 느낌'이 숨쉬지 않는 내 문학적 분위기에 실제로 대단한 아쉬움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반면에 내가 철저한 도시인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답답한 도시를 벗어나 멀리 바다로 산으로 가는 일을 자주 꿈꾸곤 하지만 운전면허가 없어서 그마저 잘 실행하지 못한다. 나는 문명의 이기에 익숙하지 않다. 나는 그리워할 고향을 어디로 삼아야 할지 모르는 채이고, 그렇다고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 오래 살고 싶은 마음도 없다. 이를테면 나는 도시와 자연 사이에, 이 고향과 저 고향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여 있는 존재이다. 핵심을 말하면, 나는 바로 그 이중적인 자리를 의미 있게 형상화하겠다는 생각에 충만해 있는 사람이다. 원래 이중적인 사람은 말이 없는 법, 나는 어정쩡한 자리에 서 있는 나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일을 삼가고 남의 성장사, 남의 체험담, 남의 각오를 듣기를 더 좋아한다. 다행스럽게도 내 앞에서 자신의 비밀 같은 사연을 늘어놓는 고마운 사람들이 많아서, 나는 그들의 이야기에서 특히 내 성장사에 없었던 것들을 찾아내곤 한다. 나는 내게 없는 자연을, 고향에서의 체험을 그들에게서 얻는다.

내 고향은 바로 그 사람들 사이에 있다.

박덕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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