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겨울이 시작돼도 언 손 녹일 수 있는 훈훈함이 있으니까.
초겨울의 문턱이다. 일년 열두달 중 열달이 훌쩍 뛰어 넘어 갔다. 바로 이즈음, 문득 저무는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고 싶어질때, 가을의 뒷모습이나마 만나볼 수 있는곳은 없을까. 지난 주말 찾은 경남 함양이 그랬다. 그중에서도 아직 가을의 운치를 온전히 담고 있는 상림숲(천연기념물 154호)은 낙엽의 '마른 이파리'냄새가 훅하니 풍겨온다. 휘황찬란한 단풍명소는 아니지만 2km는 됨직한 흙길. 그 흙길위에 쌓일대로 쌓인 낙엽의 바스락 거리는 소리. 어른 2, 3명이 깍지를 껴야 안을 수 있는 수백년 된 고목들. 위천변의 억새들.돌 돌 실개울을 따라가는 오솔길. 거기서 데이트중인 연인들. 호화롭지는 않지만 청초한 느낌. 은근히 기대했던 대로 오가는 길손의 몸과 마음을 아늑하게 맞아주고 있었다.
지리산 밑자락에 자리한 함양은 아직 때묻지 않은 두메산골. 여행이나 관광지로 유명한 곳도 아니다. 흔히 지리산을 오르기 위해 스쳐 지나는 곳이다. 그러나 구석구석살펴보면 자연과 조화를 이룬 옛 삶의 운치와 따스한 인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곳이어서 어느 순간 정이 흠뻑 든다.
함양군청에서 5분거리에 있는 함양읍 운림리 상림(上林). 상림은 활엽수림의 전시장이다. 또한 외지 길손의 쉼터요, 함양사람들에겐 동네 사랑방이다. 사시사철 부모와함께 나들이 나온 유치원 아이들부터 연인들, '마실'나온 칠순 노인들까지 언제나 사람들이 들락거린다.
상림은 국내 최초의 인공림으로 알려져 있다. 약 1천100년전 통일신라말 진성여왕때 대학자 최치원선생이 이곳 태수를 지내면서 조성한 호안림(護岸林)이다. 원래 마을을가로지르던 위천이 자주 범람해 피해가 크자 둑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심은 것이 상림의 기원이다.
신기하게도 소나무는 눈에 띄지 않는다. 120여종, 2만여그루의 활엽수림이 봄, 여름, 가을, 겨울 제각기 독특한 풍광을 자랑한다. 숲길 사이사이로는 사운정, 화수정,초선정, 함화루 등 옛 정자와 누각이 서 있다. 최치원 신도비와 척화비도 보인다. 관찰사와 부사 등 선정을 펼쳤던 위정관들의 송덕비, 팔뚝이 잘려나간 고려때의 '못난이 불상'(이은리 석불)도 모셔져 있다. 이곳 저곳 눈길을 주다보면 1시간은 금방 지나간다.상림에는 최치원선생과 관련된 전설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효자로 소문난 최치원은 어느날 저녁 어머니로부터 상림에서 뱀을 만나 질겁을 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최치원은 곧장 상림으로 달려가 "이제부터 일체의 뱀이나 해충은 상림에 들지 말라"고 크게 호통쳤다고 한다. 그 후 상림에는 뱀, 개미 등의 미물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아니, 나왔다는 이야기조차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천년을 넘게 이어온 숲. 이처럼 따스한 온기가 스며 있어서 일까. 옷깃을 여미는 바람에도 사람들은 별로 추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대구답사마당(053-423-1885)은 내년 1월 4일 함양의 정자문화를 찾아가는 가족테마여행을 떠난다.
글.사진:노진규기자 jgroh@imaeil.com
▨근처의 가볼만한 곳
△병곡~서하면 고갯길=상림에서 나와 시간여유가 있다면 백운산을 끼고 넘어가는 1001번 지방도를 타면 드라이브의 재미도 즐길 수 있다. 병곡, 백전, 서하면으로연결되는 고갯길이다. 경사도가 만만치 않아 한 순간도 핸들을 놓을 수 없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지리산과 백운산의 웅장한 산세에 주눅들기 때문이다. 쭉쭉 뻗은 나무에 노란 물감을 마음대로 뿌려놓은 듯한 절경이 연달아 이어진다.
△화림동계곡=미끄러지듯 유연한 너럭바위, 명경지수의 맑은 계곡물이 반겨준다. 물맑고 경치좋은 곳에 역시 빠질 수 없는 것이 정자.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농월정을 2, 3km간격으로 만날 수 있다. 경상도의 정자촌이라 할 수 있다. 옛날엔 화림동의 팔담팔정이라 했으나 지금은 아쉽게도 4곳만 남아 있다. 정자마루에는 한낮의햇볕에 무우말랭이가 뒹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눈감아 주자. 이곳에다 건물을 짓고 자연과 벗되려한 선조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자.
▨맛집=함양읍의 대성식당(055-963-2089)은 쇠고기국밥 한가지로 40년 내력을 이어온 집이다. 안의면에 있는 30년 전통의 안의원조갈비찜집(055-962-0666)도가볼만 하다. 지리산 종단도로에서 마천면으로 들어가는 초입의 월산식육식당(055-962-5025)은 지리산 토종흑돼지 전문식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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