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월동(越冬)

월동준비가 한창인 때다. 김장을 마친 어머니는 청국장을 언제 띄울 것인가 손가락을 꼽아보신다. 어릴 적 김장철의 모습은, 커다란 트럭이 배추를 가득 싣고 동네에 나타나면 집집마다 나보다 높은 키의 배추를 실어 가는 풍경이었다. 거기에는 배추.무에서 떨어져 나온 무청이나 배춧잎들을 모아 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곤 했다.

서양화가 밀레의 '이삭줍기'라는 그림에도 무청을 줍던 사람과 비슷한 이삭줍는 여인이 등장한다. 풍성한 수확을 거둬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등뒤로 하고 그제서야 그들이 흘리고 간 이삭을 주워 모으는 아낙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어른이 되고 보니, 한철을 대비하는 모습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게되고, 나아가 인생의 월동도 준비해야 되는구나를 깨닫게 된다. 겨울을 건너가고, 삶을 건너가는데 준비해야하는 것이 한두가지이랴마는 집 값이 올랐다는 보도를 들으니 '월동준비'라는 말과 함께 '내집마련'이라는 슬로건이 지나간다.

'집을 짓는 것'은 내 몸을 누일 공간을 마련하는 수고이고, 완성된 '집'은 노동의 수고를 위로해주는 안식처이다. '집'은 고아의식을 잠재우는 어머니와 언젠가는 돌아갈 귀소처로서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그래서 '집을 짓다'에서 '몸을 눕히다'로 이어지는 말에는 노동과 휴식 모두를 담아내고 있어, 단순히 '장소'로서의 의미보다는 문학적·철학적 의미로 사용되는 예가 많다.

이런 형이상학적이거나 수사학적인 사용 외에 피부로 체감하는 '집'이 '내집마련' 슬로건일텐데, 경제적으로는 재산의 증식이나 투자의 의미로, 사회적으로는 계층 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지표로, 심리적으로는 은행 할부금이라는 부담감을 드러내는 물건으로 이해된다. 또한 부지런함과 어른으로서의 구실을 측정하는 도덕적.관습적.문화적 의미도 담고 있으니 '집'을 마련하는 것은 일종의 성숙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집마련'이라는 슬로건에서 느끼는 한기는 아마도 베짱이가 아닌데도 '집'을 마련할 수 없는 현실 때문 아닌가 한다. 남인숙(갤러리M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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