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하는 오후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 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

겨울 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면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날의 섭리에 불려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열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게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김남조 '생명'

일종의 잠언시이다. 생명의 본질에 대한 시인 나름의 주장이다. 이 시인은 대구 출신 원로로, 그간 순수주의 문학을 해 왔다. 그러나 이 시는 민중주의적 시각이 녹아 있다. 기독교도들에게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불자들에게는 빈자일등이 세상의 광명을 밝히는 것으로 가르쳐 왔다.

마찬가지로 생명도, 진실도 부숴지고 버려지고 피흘리면서 온다. 그러나 우리는 이 평범한 사실을 쉽게 잊고 산다. 오늘도 내 삶의 외양이 화려하지 않다고 절망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김용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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