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민군 9월 총공세 제보 장본인 재미교포 홍윤희옹

육사 입교생이 인민군 위생병이 되었다가 결정적 군사정보를 가지고 탈출해 왔으나 이적행위로 징역살이를 하다 결국은 이민을 떠나야 했던 재미교포 홍윤희(洪允憙.72)씨의 인생유전. 그는 요즘 6.25 전사를 다시 쓰는데 도움이 될 단서를 찾아 낙동강 전선을 누비고 있다.

6.25 당시 한강폭파로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 낙오된 홍씨는 남로당원이던 고향친구의 도움으로 의용군에 위장입대했다. 그해 8월28일 인민군 1사단 직할부대 위생중대에편입돼 군위 효령까지 내려온 그는 인민군총사령관의 '9월 총공세' 명령을 알리기 위해 9월 1일 밤 목숨을 걸고 탈출했다.

이튿날 당시 달성군청에 주둔하던 육본 정보국과 UN군사령부에 인민군의 병력배치와 중장비 은닉실태 등을 4시간에 걸쳐 브리핑했으나 그후 돌아온 것은 간첩.이적 혐의와사형선고였다.

무기수로 복역 중 전쟁이 끝난 1955년 가석방된 홍씨는 '이적자'란 딱지를 지닌채 좌절의 세월을 보내다 1970년대 초반 연좌제를 피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10년후미국에서 일본어판 '조선전쟁'이란 책을 읽던 그는 사실과 다른 전사를 발견했다.

'1950년 9월2일 아침 인민군 김성준 소좌가 귀순해 인민군 총공격계획을 고백, 워커 UN군사령관이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인천상륙을 위해 철수했던 해병대까지 재투입했다'는 것이었다.

홍씨는 미 육군성 역사국과 문서보관소에서 "김성준의 귀순은 1950년 9월1일 아침이며 총공격 정보를 제보한 것도 아니고 1953년 8월 포로송환 때 북으로 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당시 소송기록과 판결문도 찾아냈다.

자신의 이적행위 누명과 인민군의 9월 총공세 그리고 김성준 소좌의 귀순에 얽힌 미스테리가 풀리는 듯했다. 국방군사편찬위원회에서도 전사(戰史)의 잘못을 인정했다.그러나 재심청구와 전사의 정정을 위해서는 당시 홍씨에 대한 '포로심문조서'와 'UN군사령부 브리핑 보고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난 주말부터 군위 효령과 칠곡 가산 일대를 둘러보던 홍씨는 본사에 도움을 요청해 왔다. "1950년 9월2일 아침 6시경 인민군 복장의 자신을 발견 또는 대구로 호송한 장병, 달성군청에서의 포로심문이나 원대복귀 관련 문서, 같은날 오후 대구 유엔군사령부 브리핑 참여자나 관련 보고서, 9월11일 부산 대교동 감찰감실 분실에서 자신을체포한 헌병이나 관련문서, 9월20일 자신을 재판한 계엄고등군법회의 관계자나 관련문서 등에 대한 일말의 증언이나 자료가 있으면 연락바랍니다". 홍씨는 한 개인의명예회복과 함께 역사의 진실복원을 위해 관계자들의 적극적인 제보를 당부했다.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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