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 하는 오후

나는 지금 창가에 서 있다창은 제 폭만큼 세상을 끌어들인다

탱자나무 울타리가 쳐진

산기슭 채전 밭에서

남자가 삽으로 흙을 일구고 있다

멀리서 보니

그 남자의 몸에 탱자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등을 구부릴 때 나무는 배경이 되고

일어서면 함께 탱자나무가 된다

밤사이 내린 비로

흙은 한껏 부풀었고

그 흙을 일구어 젖무덤같이

도도록한 이랑을 만든다

남자는 탱자나무 가시로 온 몸을 둘러싼다

아픔을 막기 위함이다

그러면서 도툼한 젖무덤에 씨를 뿌린다

힘이 드는지 남자는

밭둑에 앉아 쉬고 있다

그 사이 탱자나무는 껑충 자라서

허공을 조금씩 찔러대기도 한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이명숙 '풍경 1'

시인의 예민한 촉수가 느껴지는 즉물적 풍경시이다. 시적 화자는 야산 기슭에 잇대어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다본다. 마침 산기슭 채전 밭에서 남자가 삽으로 흙을 일구고 있다. 이 부분이 시의 경계이다.보통 사람이라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흔한 일상사가 시인의 눈에 잡히면서 아름다운 서정시로 변한다. 그래서 프랑스 시인 랭보는 시인은 보는 자(見者)라고 했다. 남들이 지나치는 일상을 가지고, 도도록한 이랑과 같은 시를 빚어내는 그 장인성이 돋보인다. 김용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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