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내리자 겨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심장병 도지게 만드는 정치나, 어깨 저리는 불경기, 또는 골 싸매는 대학 입시의 고민도 잊은 채 잠깐 하얀 세상을 바라보며 동심에 젖기가 무섭게 꿈 속에서 당첨된 복권처럼, 첫사랑처럼 첫눈은 쉽게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풍성하게 축복처럼 내린 첫눈은 분명 이제는 겨울, 어느덧 또 한 해가 흘러가는구나 하는 감회에 빠져들게 한다.
성급한 상혼(商魂)들은 벌써부터 크리스마스 기분 돋우느라 소란스러워졌다. 거리엔 어느새 색색의 반짝이 전등들이 늘어나고 있다. 망연회의 계절이 다가온 것이다. 연중 술 소비량이 가장 많은, 유혹처럼 술의 향기에 소매가 끌려 취해야 할 철이다.
대체 지난 1년 동안 무얼 했던가를 반성할 틈도 없이 요새 사람들은 다 바빠졌다. 모르긴 하지만 아마 성질 나쁘거나 왕따 아닌 보통 사람들이라면 12월 한 달 동안 적어도 5회 이상의 망년 모임을 가질 것이다. 물론 이런 계산은 주먹구구식으로 회사 망년회부터 고향, 초.중.고.대학 동창 모임만 하면 벌써 6회, 여기에 알파를 가감하면 대충 보통사람들의 망년회 횟수일 터이다. 잘 나가는 사람들은 거의 매일이 아니라 하루에도 몇 차례씩 겹치기 출연을 해가며, 그걸 참석하는 곳곳마다 자랑스럽게 선포하고는 자리를 뜨곤 하여 부러움과 빈축을 함께 사기도 한다. 봄엔 꽃놀이, 여름엔 휴가, 가을은 단풍 구경, 겨울은 망년과 신년으로 사계절 그저 마시고 노래할 명분으로 그득한 즐거운 우리나라인가.
망년회(뿐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술자리 법칙 제1조)는 언제나 최소한 3차를 넘겨야 직성이 풀린다. 적어도 5차쯤 어정거리노라면 새벽이고, 아예 참석자 중 가장 인도주의적 정신이 강한 사람의 집에 가있기 마련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 주도(酒道)는 3차쯤 되면 노래방 행이 되어버렸다. 흥이 나서라기보다도 워낙 세상 돌아가는 판세가 더럽고 치사하니까 아예 외면하고 노래나 부르자는 셈인지는 모르겠으나 세계 제일의 노래 왕국이 되어버린 건 부인하기 어렵다. 얼마나 중증이면 해외여행 나가서도 관광보다 노래방 가는 걸 더 중시하는 예도 있다. 쿵쾅거리는 노래방 분위기는 대화는 필요 없다는 선전포고 같다. 어찌 노래만 등장하겠는가. 춤이 나오기 마련이다. 이러자니 저절로 얼큰해야 될 테고, 그걸 위해 술을 더 마시게 될 수밖에 없다.
그나마 노래방이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취하면 자기 주장이 강해지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질은 으레 엉터리 정치판 이야기를 하다가는 판을 작살내는 정도가 아니라 평생 원수가 되는 경우도 흔하다. 그놈의 정치가 뭔지 왜 이리도 착한 사람들 가슴에 불을 지펴 분노하도록 만들어 엉뚱한 사람과 싸우도록 할까. 이렇게 마시고 노래하고 춤 추는데 바치는 시간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분명 이건 세상 꼴이 아니다. 노래방 장치의 원산지인 일본을 훨씬 능가하는 이 풍조는 어찌 보면 사회와 정신의 황폐화 제일보인지 모른다. 세계적으로 이미 정평이 나있는 '한국인의 신명떨이'니 만큼 더 이상 만류나 규제가 불가능하다.
그래설까. 요새 사람들은 젊은데도 건망증 투성이다. 노래 가사 하나를 제대로 안 외우고 마냥 기계대로 따라 하는데 이골이 났다. 그냥 노래하라면 다 "기계가 있어야…"라고 얼버무리기 일쑤다. 우리 스스로가 기계의 노예화를 자청하고 나선 꼴이다. 이런 기억력 감퇴가 앞으로 우리 사회를 어떤 양상으로 몰아갈지 심히 의아스럽다.
노래방에서의 실력 발휘가 어떨 때는 사무실에서의 업무능력보다 더 소중해져 이를 위해 아예 혼자서 열심히 연습하는 사람도 늘어나는 판이니 세상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오죽하면 그거라도 않고는 못 배길까 싶다. 이래저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아하니 여전히 술 소비량과 노래방 경기는 상승곡선일 것 같다. 이 두가지로부터 해방될 때라야 아마 우리사회도 성숙하여 인간과 인간이 만났을 때 대화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우원식 "최상목, 마은혁 즉시 임명하라…국회 권한 침해 이유 밝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