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 하는 오후

나도 이제 내묘비명을 쓸 때가 돌아온 것 같다.

이런 말을 하면 자네는

아니 벌써?하고 웃을지도 모르지만

다정하고 잔인했던 친구여,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었고

눈 덮인 길에는 핏자국이 찍혀있다.

어저면 나는 오랫동안

이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살았는지 모른다.

내가 걸어온 시대는 전쟁의 불길과

혁명의 연기로 뒤덮인 세기말의 한때였고,

요행히도 나는 그것을 헤치고

늙은 표범처럼 살아남았다.

수많은 청춘들이 누려야할 기쁨조차

누리지 못한 채 꽃잎처럼 떨어지고

거룩한 분노가 캐터필러에 짓밟혀

무덤으로 실려 갔을 때도 나는

집요한 운명에 발목 잡혀서

마지막 잎새같이 대롱거렸다.

손을 놓아야 한다!

서커스의 소녀가 어는 한 순간

그넷줄을 놓고 날아가듯이

저 미지의 세계로 제비가 되어 날아가며

고독한 포물선을 그려야 한다.

그것이 내 마지막 고별의식이 되기를 바라면서….

-민영 '묘비명'

시인은 1934년 생이니까 실제 나이로 일흔을 앞두고 있다. 이제 이승을 마감하고 또다른 삶을 꾸려야할 시기가 온 것으로 시인은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근래 우리사회 일각에서는 미리 '유서쓰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오만과 질주로 뒤덮인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자는 자기성찰 운동이다. 이 시인도 자신의 삶을 되짚어보고 있다. 그 프리즘은 대 사회적이다. 전쟁과 혁명의 열기 속에서 젊은 꽃잎들이 떨어질 때도 집요하게 살아남았던 한 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있다.

김용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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