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12월의 아침

12월 중순. 생각이 많아진다. 해마다 이맘때면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자성의 시간을 갖기보다, 도심 곳곳의 들뜬 분위기에 공연히 바쁘다. 한 해를 보내며 지나온 것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나는 마음의 길을 찾아 화왕산을 올라보았다. 오랜만의 산행이라 오르기가 쉽지 않아 돌덩이의 이마도 만지고 나무의 허리도 쓰다듬으며 천천히 걸었다. 찬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차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 중턱 바위에 걸터앉았다. 별로 높이 오른 것 같지 않건마는 저 아래 들판과 강들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게딱지 엎어놓은 듯한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내가 걸어온 길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무언가 내 발목을 잡아당기는 것 같다. 산에서는 산으로 가득 차야 하건만 질척거리는 세상의 사소한 일들에 마음 빼앗기다보니 그만 다리에 힘이 빠져 산을 다시 오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숨가쁘게 달려온 올 한해

산을 오를 때는 뒤돌아보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앞만 보고가야 목적지에 쉬이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을. 가다가 쉬면 주저앉아 버릴 수도 있고, 발걸음이 더뎌 산을 오르기가 더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래 쉬다간 내쳐 쉬게 될 것도 같았다. 우리의 삶도 이럴까? 인생의 길에서 지나온 것들을 반추하다 보면 제 자리 걸음만 걷게 되지 않을까. 젊은 날에는 앞만 보고 가다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유년의 꿈을 조금씩 꺼내 음미하며 살아간다지 않는가. 산을 오르면서 뒤돌아보는 일은 알사탕이나 초콜릿 먹듯 해야 하나보다.

산 정상을 오르는 돌계단을 몇 개 앞두고 산의 우묵한 구릉 사이로 푸르다 못해 시린 하늘 한 자락을 보았다. 돌계단이 바다로 가는 사다리 같았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그 속으로 풍덩 뛰어들고 싶을 지경이었다. 깊고 투명한 하늘은 가까이 다가 갈수록 점점 더 뒤로 물러섰다. 깊고 푸른빛에 마음 빼앗기다보니 어느새 발 아래로 억새밭이 펼쳐져 있다. 바람결에 흔들릴 때마다 물결이 이는 듯, 억새 사이를 지나는 사람들이 수초 사이를 떠다니는 것 같았다.

산 정상에서 보이는 산 아래 풍경, 저기 아옹다옹 얼굴 붉히며 부대끼며 사는 세상. 물 속 같아 보였다. 저기가 바로 바다 속, 하늘바다구나 싶었다. 길 끝에서 바닷물이 밀려와 산 아래 마을이 잠기고 순간 모든 것이 잠겨드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 시대의 어두움도 바닷물이 휩쓸어 가버리길 바랬다.

높은 곳에서 바라본 새로운 풍경이 한참동안 나를 들뜨게 했다. 무심코 바라보던 풍경이 전혀 다른 세계가 되어 펼쳐져 있었다. 우리의 삶도 조금만 위치와 생각을 바꾸면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세상도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워질 수 있을 텐데….

아침을 맞이하듯 새해를 맞자

자꾸 뒤돌아보려는 마음에 걸음을 빨리 했다. 어느 결에 불쑥 해가 돋았다. 나는 아침을 맞을 때마다 문을 하나씩 통과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 문을 밀 때마다 두근거림과 기대를 갖는다. 활짝 열어 제칠 때도 있고, 살며시 밀어 볼 때도 있다. 아침은 우리가 세상과 만나는 희망의 시간이기에 매번 그 느낌은 다르게 다가온다. 아침이 찬란한 빛 속에서, 안개 속에서, 내리는 눈 속에서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아침을 맞이한다는 것, 장엄한 자연의 순리에 그저 감동적이다. 이 아침, 나는 산꼭대기에서 경건하게 하루의 문을 열어 본다. 산 위에서의 문 열기는 또 다르다. 나를 찾고, 아직 남아 있는 미움의 찌꺼기도 말끔히 비워내게 한다. 살아 있는 존재로서 다시 한번 행복의 순간을 소중하게 누려보는 것이다. 모든 것을 벗어버린 겨울나무들처럼 나도 다 비우고, 내일 또 다른 아침을 맞아 새로운 문이 열리기를 꿈꿔 본다.

박지영〈시인〉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