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석(69), 이연호(62)씨는 할아버지 주유원이다. 대구시 서구 비산 네거리 모퉁이에 자리잡은 '태양 오일 뱅크'가 두 사람의 직장. 번잡한 길가에 주유소가 자리잡은 덕분에 차들은 끊임없이 들락거리고 두 사람은 대기실과 주유기 사이 10여 미터를 쉴새없이 뛰어다닌다.
성품이 유달리 쾌활한 박한석 할아버지는 이 주유소에서 7년째 일하고 있다. 젊은 시절엔 장사를 했지만 60세가 넘으면서 주유원이 됐다. 물건을 팔려고 목청껏 외칠 필요가 없고 무거운 짐을 들거나 운반할 필요도 없어 좋다. 주유원은 정말 좋은 직업이라고 연신 자랑이다.
얌전한 성품의 이연호 할아버지는 3년째다. 3년 전 논공의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정년 퇴임한 후 일감을 찾다가 주유원이 됐다. 지금은 베테랑이 됐지만 초창기엔 실수를 저질러 낭패를 당하기도 했다. 휘발유차에 경유를 넣거나 경유 차에 휘발유를 넣기도 했다. 카드 전표 끊는 법도 주유원이 된 후에 알았다. 할아버지 주유원의 단점이라면 기껏 그 정도다.
"세상에 이만한 직장이 없어요". 기자가 두 할아버지에게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가 무안만 당했다. 할아버지들이 주유원을 천직으로 여기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우선 나이 든 사람이 천덕꾸러기로 내몰리기 십상인 풍토에서 선뜻 일자리를 내주니 고맙다. 업무도 마음에 든다. 생긴 모양은 묵직해 보이지만 주유기는 무겁지 않아 노인의 마른 손에도 힘들지 않다. 연이어 차가 들어오니 지겨운 줄도 모른다. 70만원 남짓한 월급이지만 손자손녀들에게 과자를 사주고 용돈도 줄 수 있어 기쁘다. 자신을 맥빠진 노인으로만 쳐다보는 아내에게 월급봉투를 내밀 수 있으니 더 부러울 게 없다. 아파트 경비원에 비하면 근무시간도 무척 짧다. 야간 근무조인 두 할아버지의 근무는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밤 12시부터 아침 6시까지는 영업을 중단하고 기숙사에서 잔다. 하루 근무시간은 5시간, 이튿날 낮엔 충분히 여가를 즐길 수 있다. 등산도 다니고 친구도 만나고 시장 구경도 나선다.
주유소 입장에서도 할아버지 주유원은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마음이 내키지 않거나, 유흥비가 모이면 금세 그만두는 젊은이들보다 할아버지들이 훨씬 좋습니다. 결근이나 지각하는 법이 없고 맡겨놓고 퇴근해도 마음이 푸근해요". 오래 전부터 할아버지 주유원을 고집해온 이 주유소 사장의 평가다. 할아버지 주유원의 장점은 또 있다.
"주유소에 들어오면 담뱃불을 끄십시오"라는 할아버지 주유원들의 요구를 젊은 운전자들이 모른 척 할 수 없어 화재위험도 줄어든다. 나이 어린 주유원이 그렇게 말했다가는 뺨을 맞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충분히 더 일할 수 있었지만 퇴임 후 직장을 찾기가 힘들었다는 두 할아버지. 아직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정년 퇴직자라면 인근의 주유소를 찾아가 보라고 조언한다. 노인이 하기에 안성맞춤인데다 한 두 달 일하다가 떠나지 않으니 주유소 입장에서도 손해볼 게 없다는 말이다.
감청색 점퍼에 권총(주유기)을 든 할아버지 주유원 박한석, 이연호씨. 앞으로 10년은 더 일하고 싶다며 웃는다.
조두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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