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높아가는 도심 스카이라인을 뒤로한 채 17일 새벽 장수의 고장 예천으로 달렸다. 경북도가 올해의 장수마을로 추천한 예천군 개포면 이사리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5시. 마을 입구에 서있는 수백년 된 느티나무가 이사리란 표지석을 앞에 둔 채 큰 팔을 벌리고 있다. 마을로 들어서자 하얀 서리를 맞은 배추를 뽑아나오는 정연희 할머니(86)를 만났다. 소여물에 넣을 배추를 마련하는 중이라 한다. "안 추우세요"라는 질문에 "춥기는 뭐가 춥노"라며 벌써 마을을 한바퀴 휙 돈 뒤라고 한다. 해가 뜨기전이지만 마을의 굴뚝마다 흰연기가 모락모락 솟아오르고 집집마다 소여물 끓이는 손길이 분주하다.
신상완(61)이장의 안내를 받아 이사리 최고령자 신기매(96) 할머니 댁을 찾았다. 할머니는 이제 막 마을을 한바퀴 돌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추운데 왜 다니세요?" "추우나 더우나 일을 해야 살제, 내가 16세에 시집와서 80년 가까이 이곳에 살았지만 아직까지 병원신세 한번 진 적 없어"라며 한시도 움직이지 않으면 좀이 쑤신단다. 할머니는 아직까지 지팡이 없이도 꼿꼿이 허리를 편 채 마을을 다닌다고.
영월 신씨의 집성촌인 이사리의 노인들은 생신때마다 주민들로부터 잔치상을 받는 즐거움을 누린다. 점심때쯤 동네 어귀에 있는 마을회관에 마을노인들이 모두 모였다. 이사리 부녀회가 노인들에게 점심대접을 위해 마련한 자리다. 70세 이상의 노인들이 저마다 상을 받고 앉아 얘기꽃을 피우는 한쪽에선 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노인들이 돼지고기를 자르고 떡을 담느라 분주하다. 이사리에서는 70세 이전에는 노인대접은커녕 청년회와 부녀회에 소속돼 마을일을 도맡아 해야한다. 그러니 이런 행사는 당연히 부녀회의 몫.
이사리의 노인들은 도시 노인들이 겪는 외로움이나 무료함과는 거리가 멀다. 또래 친구가 많은 데다 집성촌이어서 거의가 일가친지다. 내집네집이 따로 없고 웬만한 일은 품앗이로 해결된다.
짧아지는 겨울 해가 넘어갈 즈음 신상소(91), 정연희(86) 노부부 댁을 찾았다. 정할머니는 14살에 시집와서 72년동안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할아버지는 가는 귀가 조금 먹었을 뿐 아직까지 기력이 왕성하다. 소여물을 끓이기 위해 장작을 패는 할아버지의 손놀림이 얼마나 빠른 지 혈기왕성한 젊은이 뺨칠 정도다. 힘들지 않으냐고 하자 "배운게 이것 뿐인데 힘들긴 뭐가 힘들어"라며 하던 일을 계속한다. 장작패기를 마친 할아버지. 이번엔 소마구간 앞에서 할머니와 함께 짚을 썰어 소에게 먹이는 작업을 시작한다. 사진촬영을 하자 할머니는 "오늘 영감, 할마이 시험치는 날이다"며 "영감 열심히 하소"하고 너스레를 떤다. 장수비결을 묻자 비결이 뭐 있겠냐며 먹고싶은 것 많이 먹고 마음이 편하면 제일이라고.
전형적인 농촌마을 이사리의 장수비결은 무었일까?
다른 장수촌과 마찬가지로 맑은 공기, 깨끗한 물, 욕심없이 살아가는 순박한 인심이 있다. 적게 먹는 것이 장수 비결이란 상식과는 달리 이곳 노인들은 맵고 짠 음식 가리지 않고 쌀밥에 된장, 김치를 즐겨 먹으며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배불리 먹고 있다. 이곳 노인들의 일과는 해가 뜨면 일어나 일하고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드는 것. 마당청소와 소여물 주는 것은 물론 밭에서 고추를 따는 등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정우용기자 sajaho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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