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달라지는 '송년회'

지금은 주로 '송년회'나 '송년 모임'으로 부르는 '망년회(忘年會)'는 술과 깊은 함수관계를 가진 모임이다. 술로 한해를 떠내려 보내기라도 하려는 듯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도록 2차, 3차까지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게 통례다. 망년회의 원조격인 일본에서도 사정은 비슷해 연말로 접어들면서 '아루하라'경계령이 내려지곤 한단다. '아루하라'는 영어의 '알코올(alcohol)'과 '괴롭힘'을 가리키는 허래스먼트(harassment)를 합성한 일본식 조어다. 모임에서의 음주 강요를 지칭하는 말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우리 민족은 워낙 술을 좋아해서 그럴까, 고전 '삼선기(三仙記)'에는 수십종의 술 이름이 등장한다. 폭탄주 이상의 '짬뽕'주연(酒宴) 장면도 나온다. 조선조의 성종(成宗)은 신하들이 취하지 않으면 술상을 못 치우도록 했고, 연산군(燕山君)은 숙직하는 군교들과 어울려 술을 마실 때 벌주를 내려 모두 토하게 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궁중의 음주문화가 이러니 민간의 풍속은 짐작이 가고 남는다.

▲송년회는 언제나 술로 끝나게 마련이다. 폭탄주가 주메뉴로 등장한 지는 이미 오래다.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그 제조법도 다양해져원자폭탄주.수소폭탄주.회오리주.충성주.연기주.드라큘라주.국자주 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이 갖가지의 술들을 원수처럼 마셔대고 다음날 아침엔 망가진 채 투덜대기도 한다. 하지만 저녁엔 또 술판이 기다려 연말 한동안은 그야말로 '곤드레 만드레'로 가족은 아예 '잊혀진 사람'이 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제 그 풍속도도 크게 달라지고 있는 모양이다. 폭탄주를 추방하는 대신 '가면 무도회' '빙고.천사 게임' '스키 타기' '부부 동반 여행' 등 이색적인 이벤트가 유행하고, 재테크 강연이 등장했다는 소문도 들린다. 술 마시는 게 너무 피곤하다는 데 의기투합한 어떤 회사는 직원들이 직접 만든 요리를 가져와 자랑하는 모임을 갖는가 하면, 사장이 직원들을 집으로 초대해 손수 만든 요리를 대접하는 것으로 송년회를 연 경우도 있다고 한다.

▲경제난으로 심신이 지쳐 있는 연말에는 동료간의 정, 이웃간의 정이 더욱 그리워지는 때다. 기분 내키는 대로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며 떠들썩하게 벌이는 소모성 송년회는 결국 우리를 또 허탈한 늪으로 빠져들게 하며, '망(亡)자 망년회'가 될 뿐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조촐하고 건전하며 정겨운 송년 모임은 새 아침을 더욱 밝게 해 주며, 소박한 자리에서 오히려 정이 더 깊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달라지는 송년회의 풍속이 널리 번질 수 있기를….

이태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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