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 생태계 '박물관' 경상남도 창녕군 우포늪. 수면을 초록으로 물들이던 봄 수초도, 가을을 희롱하던 잠자리도 사라진 지 오래다. 수면은 침잠의 빛을 넘어 이미 얕은 쪽으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겨울 바람에 허리를 꺾인 마른 갈대는 허망한 눈으로 갈색 늪을 바라보고 서 있다. 빛깔이 흰 큰고니는 쉬지 않고 긴 부리를 쑤셔 박고, 놀란 수서 곤충은 늪 바닥의 진흙 속으로 파고든다.
맹렬한 겨울바람과 철새 소리가 불협화음처럼 들릴 뿐 사위는 조용하다.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주변을 살피며 늪 둑을 따라 걷는 취재진을 향해 멀리 갈색 수초 사이로 키 작은 여인이 나타나 손을 흔든다. 물 속에 웅크리고 앉았다가 일어선 모양이다.
먼 거리를 둘러 뭍으로 걸어나온 임봉순(51)씨. 깊은 주름, 검은 얼굴, 휘청대는 걸음, 하마터면 '할머니 안녕하세요'라고 말을 건넬 뻔했다. 그는 목까지 잠기는 검은 잠수복에 어울리지 않는 건설 현장의 안전모를 쓰고 있다. 그는 트레이드마크였던 노란 안전모를 얼마 전에 잃어버렸다며 하하하 웃는다.
"오래 썼는데 아깝다, 하하하". 늪과 좀처럼 어울리지 않을 성싶은 안전모는 사실 무척 쓸모가 있다. 뜨거운 햇볕을 막아주고 물에 떨어져도 툴툴 털면 그뿐 젖지 않는다. 지금 쓴 흰 안전모는 마음씨 고운 조카가 주워 다 주었다고 했다.
29세때부터 우포늪에서 고둥을 잡기 시작했다는 임봉순씨. 서른 중반쯤 근처 학교의 급식 일을 몇 년 했지만 줄곧 우포늪에 기대어 살았다. 고둥을 잡아 딸아이 고등학교까지 마치게 했다. 며칠 전 부산대학에 원서를 내놓았다며 하하하 웃는다. 아마 그는 큰소리로 웃는 버릇을 가진 모양이다.
임씨는 손으로 고둥을 잡는다. 나일론 줄을 허리에 묶어 물위에 띄운 시커먼 고무대야와 두꺼운 장갑, 고둥을 담는 비닐 포대가 장비의 전부다. 특별히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을 빼면 일년 내내 오전 11시부터 저녁 예닐곱 시까지 물에 몸을 담그고 지낸다. 하루 5천원도 벌고 1만원도 벌고, 억세게 운 좋은 날엔 2만원도 번다.
"고둥은 봄, 여름에 제일 많아예. 봄에 많이 못 잡으면 여름에 많이 잡고, 여름에 못 잡으면 가을에 많고…하하하". 임씨의 말투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이다. 성미 급한 겨울 해는 벌써 저물기 시작했지만 고둥 반되(2천500원-겨울엔 가격이 좀 더 오를 수 있다)도 못 잡은 임씨는 꺼릴 게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다.
생태계 특별 보호구역 우포늪(우포, 목포, 사지포, 쪽지벌로 구성)의 수렵은 기본적으로 금지돼 있다. 임씨는 창녕군청과 낙동강 관리청에 고둥을 잡을 수 있는 사람으로 등록돼 있다.
낚시 그물을 놓아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허가된 사람도 14명 있다. "동무가 있으면 좋지예, 못잡구로 단속하니까 혼자 나오지예" 혼자 물 속을 헤집는 일이 두렵지 않느냐는 기자의 말에 그는 간단하게 답한다.
임씨는 땅이 아닌 물에서 일한다. 20년 이상 익숙해진 일이지만 물 속을 혼자 헤집는 일은 고독할 뿐 아니라 께름칙하다.
창녕군 이방면 거남리에서 한시간마다 다니는 버스를 타고 우포늪을 찾는다는 임씨. "아아가 대학 들어가면 돈들 일이 많거든예. 많이 벌어야 돼예". 손으로만 잡을 테니 물고기 잡는걸 허락해주었으면 하는 눈치다.
"우리 아저씨는 부산 살아예, 하하하". 임씨가 '아저씨'라고 말하는 사람은 두 번째 남자다. 첫 남자는 결혼 첫날 밤 제 애인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더니 결국 떠났다. 두번째 남자는 부산에 아내를 둔 사람이었다. 오래 전 벽돌공장 부지를 알아보고 오겠다며 5년만 기다리라고 해놓고 떠났다.
소식이 끊어졌던 그 남자도 이제 가끔씩 딸아이를 만나러 온다. "딸아이도 부산에 왕래하고 큰엄마도 인정해예, 하하하". 습관인 줄 알았던 그의 웃음이 사실은 지독한 역설이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꾹 눌러둔 고통이 밖으로 삐져 나오지 못하도록 단단히 묶어두려는 몸부림.
"메칠 전에 잡았더니 오늘은 없네. 하하하" 고무대야로 얼음을 쾅쾅 두들겨 깨가며 30분 가까이 물 속을 헤집던 임씨가 빈손으로 일어서며 또 웃는다. 임봉순씨는 봄 수초도, 가을 잠자리도 떠난 우포늪에 홀로 남아 웃기만한다. 봄이면 떠날 겨울 철새가 그에겐 유일한 동무이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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