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시내에서 도산서원 쪽으로 국도를 타고 20분 남짓 가다보면 안동호와 맞닿은 산자락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들이 마을을 이룬 군자리(君子里)를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조선초부터 광산김씨 예안파가 21대에 걸쳐 600여년간 세거해 오던 오천(烏川)마을이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자 문중의 건물들을 한데 모아 이건한 곳이다.신라 왕실 후예인 광산김씨는 원래 전라도 광산의 토성으로 고려왕조 후기에 중앙으로 진출해 명문가로 발전했고 그 일파가 경상도 안동으로 이거해 풍천구담과 와룡가구, 예안오천 등 세 곳에 뿌리를 내렸다.
이 중 한 곳인 오천리는 조선 성종때 출사한 김효로(金孝盧.1455∼1534)가 영달을 접고 입향하면서 예안파로 불려졌다.
예안읍지에는'오천 마을사람인 김부인, 김부필, 김부신, 김부의, 김부륜은 모두 퇴계 선생의 문인으로 도의와 덕행이 드높아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일컫기를 '외내(오천)사람들은 모두 군자다'라고 해 그 이후 군자리라 불렀다'고 적고 있다.
또 이곳을 칠군자마을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들 '부'자 항렬의 종형제 5명과 내외종간인 일휴당(日休堂) 금응협(琴應夾)과 면진재(勉進齋) 금응훈(琴應壎)을 일컫는 말이다.
이곳 광산김씨는 문운이 융성해 입향조의 아들인 연(緣)이 문과를 거쳐 강원관찰사 등을 역임하면서 선정과 청직으로 이름이 높았고 손자인 부의(富儀)는 퇴계 선생 문하에서 성리학에 정심, 선생의 명을 받아 혼천의(渾天儀)를 완성했으며 퇴계선생은 뒷날 역동서원을 창건한 후 그를 초대원장으로 예우해 학덕을 기렸다.
오천의 학자들은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등 나라의 위기시마다 의병장으로 구국의 길에 나서는 등 정치와 학문,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25현(賢)이 나기도 했다.이 때문에 퇴계 선생의 9대손인 이야순은 이들을 기려 '오천 25현 세계도(世系圖)'를 작성해 전하고 있으니 추로지향 안동에서 손꼽히는 충효명가임을 알 수 있다.
이곳에는 광산김씨의 선대 유물과 고문서 및 전적을 보관 전시한 숭원각에 있는 7종429점의 종가소장 고문서가 보물 1018호로 지정돼 있고 13종61점의 종가소장 전적은 보물 1019호로 지정돼 있다.
입항조를 모신 별묘(別廟)와 후조당에 딸린 재사인 주사(廚舍)(경북도유형문화재 27호)와 후조당(중요민속자료 227호), 탁청정(중요민속자료 226호), 침락정(경북도 유형문화재 40호) 등의 문화재들이 즐비하다.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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