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추운 겨울, 경기 한파까지 겹친 이 시절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표정은 과연 어떤 것일까? 살을 에는 칼바람에도 아랑곳 못하고 길거리에 서 있어야 하는 노점상들, 점포 문을 열어 놓긴 했으나 손님이 뜸해 가슴이 시린 영세 상인들, 그리고 엄동설한 길바닥으로 나 앉아야 하게 된 어느 가난한 장애인 농부의 얘기를 들어 보자.
◇어느 농사꾼의 눈물=안동의 청각 장애인 농사꾼 조웅제(59.길안면)씨는 요즘 실의에 표정조차 잃었다. 300여평의 비탈밭과 평생 홀몸을 의탁해 온 7평짜리 조립식 오두막 등 보잘것 없는 전재산마저 전부 농협 빚에 넘어가 갑자기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됐기 때문.
이미 경매가 끝난 오두막에서 우선은 지내고 있지만 집안엔 쌀 한톨도 없었다. 보일러 기름이 떨어져 방구들이 얼음장 같고 방 안엔 코가 시릴 정도로 냉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요즘은 농한기라 이렇다할 일감조차 구할 길이 없는 상황.
요즘 조씨는 낮엔 볕을 찾아 마당에서 온종일 하염없이 그저 새끼만 꼰다. 딱히 쓸 데가 있어서가 아니라 마냥 웅크리고 있자니 자꾸만 절망감에 빠져들 것 같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곁에 남은 것이라곤 기르던 강아지 한마리 뿐. 그의 유일한 식구이다.
"IMF 난리가 터지기 전 빚보증을 선 게 화근이 됐어요". 이웃 마숙재(75) 할아버지는 "조씨가 말을 못하는데다 글도 몰라 더 안타깝다"고 했다. 마을 부녀회 황영화(49)씨는 "평생 혼자 살면서도 외로워 않고 항상 새벽같이 일어나 모습을 드러낼 만큼 부지런하던 사람이 요즘은 더부룩한 모습 그대로 삶에 의욕을 잃은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7남매의 장남인 조씨에게 그동안 가장 큰 낙은 고추.참깨.콩.팥을 심어 봉지봉지 담아 뒀다가 동생들에게 전해 주는 것. 마을 일도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 한오섭(54) 이장 등 이웃들은 "생활이 넉넉잖아 형제가 뿔뿔히 흩어져 사는 걸 조씨는 항상 마음 아파하며 돈을 벌어 농지를 장만하고 모두 한데 모여사는 꿈으로 삼았었다"고 전했다.
"면사무소에서 영세민 생활보조금을 주려 해도 남은 농협빚 때문에 통장이 압류돼 돈을 찾지 못합니다. 빚 못갚는 사람은 그냥 굶어 죽으란 말입니까".
돌아서는 길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기자가 호주머니 돈을 털었으나 조씨는 한사코 손사래 치더니 새끼 꼬던 손을 풀고는 소리없이 눈물만 흘렸다.
◇얼굴이 파랗게 언 노점상들=어디나 비슷한 풍경이 있지만, 칠곡 왜관에도 대구.김천.성주 등의 관문 도로변에는 신발.옷 자동차용품.군고구마.번데기.뻥튀기.어묵.붕어빵.건빵.솜사탕.호떡.연장 등을 파는 차량 노점들이 행렬을 이루고 있다.이들은 지난 여름이나 지금이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겨울은 큰 시련.
부인과 함께 신발.옷을 파는 김정기(55)씨는 "밖에 서 있어야 손님이 와 손발이 시려도 종일 거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건빵을 파는 박성수(50)씨는 "털모자를 덮어써도 얼굴까지 덮을 수는 없어 저녁 늦게 집에 돌아가면 얼굴이 시퍼렇게 얼어 감각도 없지만 자식들 공부시키고 먹고 살자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 했다.
차 속에서 어묵.떡볶이.붕어빵을 팔던 이병식(45)씨는 "화물칸을 비닐로 둘러 놔도 춥기는 마찬가지이고 종일 쪼그려 앉아 있자니 허리.다리가 너무 아프다"고 했다. 군고구마 장수 김씨(41)는 "장사가 잘 되는 날은 하루 5만~6만원 수입도 올린다"며, "대부분 50대 이상인 단골들은 격려도 많이 해 준다"고 말했다.
◇마음이 추운 중소 상인들=농촌지역 연말 경기가 올해는 더 썰렁하다고 가게 상인들은 답답해 했다.
성탄절이던 지난 24, 25일조차 왜관 읍내에서는 각종 선물가게, 제과점, 과일가게, 꽃집, 노래방, 술집, 옷가게, 식당 등이 밤늦도록 문을 열었지만 손님이 작년의 절반에 불과했다는 것. 특히 밤 11시 이후엔 중앙로에조차 사람 발길이 끊기다시피 한산해 일부 가게들은 아예 일찍 문을 닫아버리기도 했다.
팔공산 일대에서도 젊은 연인들이 찾는 카페 등 외에는 노래방.식당.여관 영업이 예년과 다르다고 업주들은 말했다. 식당을 하는 유태현씨는 "올해는 드라이브 차량들만 넘쳐 도로가 복잡할 뿐 업소를 찾는 손님은 크게 줄었다"고 했다.
국도.지방도변 가든 형태의 업소들도 올해는 가족 단위 손님들이 많을 뿐 회사원 등 단체 술 손님은 많이 줄었다고 했다.
칠곡.장영화기자 yhjang@imaeil.com
안동.권동순기자 pinok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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