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02 매일신춘문예 시조 당선작-어떤 肖像

흐린 불빛에 돌연어지럼증이 일어

불태워 밝히고 싶은

어둔 저 가슴 한복판

천천히

들이붓는다

몇 잔 검푸른 독주

입 닫고 눈 닫고

귀마저 틀어막던

차마 못 깨뜨릴

오랜 고독의 뼈대

누군가

나무마치로

바스러뜨리고 있다

▨당선소감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볼 때 그것을 밑줄 삼아 얹어 놓았던 숱한 그리움의 언어들,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 바람에 모조리 날려 버리고 싶었던 고통의 언어들, 잎새 한 잎도 거두지 못한 뼈마디 앙상한 나뭇가지에 다정히 걸쳐 주고 싶었던 언어들, 작은 가슴 넘치도록 솟아오르는 언어들 때문에 몸부림쳐봐도 시다운 시를 쓸 수 없어 자신을 몹시 책망하며 부끄러워했습니다.

작품이 당선작으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시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에 모든 것들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워 벌떡 일어나 세상을 얼싸안고 싶은 감동이 느껴졌습니다. 시조를 쓰게 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지만 시조에 대한 묘미를 발견했을 때의 감동은 참으로 컸습니다.

정제된 질서에 감칠 맛 나게 풀려 나가는 오묘한 말의 연줄이 마침내 무한한 허공을 날았다 가슴을 타고 내려와 넉넉함으로 안기는 것을 작품을 통해 체험했을 때 저는 시조가 우리 민족문화의 당당한 유산임을 깨달았습니다.

존경하는 어느 시조 시인의 작품은 시조의 존재 가치와 고귀한 정서, 아울러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까지 느끼게 했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이 소중한 기회를 발판삼아 시를 통해 행복해질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에 더욱 힘쓰겠습니다. 당선작을 가려내느라 애쓰신 심사위원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약력

△1966 전북 익산 출생 △전주교대 국어교육과 졸업 △대구 율하초등학교 교사

▨심사평

신춘문예 당선작을 뽑는 일은 고통과 기쁨을 동반한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정신의 숙도를 가늠하는 일이 고통이라면, 그로 말미암아 전혀 새로운 감성을 만나는 일은 다시 없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숙고 끝에 마지막까지 손에 남은 작품은 네 편. 이순희씨의 '鳶'과 최기송씨의 '떡살'은 우리 전통 생활 소재에다 생존의 애환을 담아내고 있다. '떡살'이 심상의 차분한 결구에 치중했다면 '연'은 좀더 열린 쪽이다.

두 편이 다 녹록찮은 시력을 보여 주지만 어떤 유형적인 본새를 벗지 못한 게 흠이다. 이우식씨의 '한개의 달걀을 위한 명상'은 달걀 부화과정을 통해 생명에 대한 전율을 감지케 한다. 착상이 신선하고 이미지의 전개가 활달한 반면, 표현의 적확도와 완성도 면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당선작으로 가려낸 이숙경씨의 '어떤 초상'은 신춘문예의 일반적인 투에서 벗어난 작품이다. 무리하게 상을 끌어가려는 욕심을 접은, 빈틈없는 구성과 개성적인 수사가 돋보인다.

찬찬히 들여다 보면 그것은 가식이나 욕망의 더께를 걷어낸 갈등의 내면 풍경으로 드러난다. 청렬한 정신의 순도를 느끼게 하는 '몇 잔 검푸른 독주'를 시대의 질곡 위에 '천천히/ 들이붓는' 감각이 예사롭지 않다. 모쪼록 당선의 영예에 안분하지 말고 더 좁고 가파른 길을 내달릴 각오를 다져 주기 바란다.

박기섭(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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