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하는 오후

노을이 비껴가는 공사장에콘크리트처럼 박제된 시간이 있다

골재를 실어 낸 깊은 웅덩이에

둥근 달이 빠져 있다

가만 들여다보니

달은

잔잔한 물 아래

배고픈 아이처럼 엎드려 있다

바람도 없는 이른 밤

누가 켰을까

공사장 너머

하늘에 매달린 수은등 하나

-정태일 '달과 수은등'

점경이 뚜렷한 시이다. 한국 시사(詩史)에서 30년대 시인 이상(李箱)이 건축기사였다. 최근에는 함성호같은 이가 건축기사 시인이다. 이 시를 쓴 정태일 시인은 지역의 중견 건설업자이다. 우리시사에서 희귀한 직업을 가진 시인에 속한다.

물론 시를 쓰는 데 직업은 별 의미가 없는지 모른다. 그러나 시를 자신의 구체적 체험에서 출발시켰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둘째 연의 웅덩이에 빠진 달이 왜 하필이면 배고픈 아이가 엎드린것 처럼 보였을까?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이것도 시인의 무의식에 찍힌 상흔인 것이다.

김용락〈시인〉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