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역 2년 노숙 청산 김종인씨

불과 이틀 전만 해도 그는 노숙자였다. 끼니는 지하철 대구역 노숙인 무료급식지원센터에서, 잠은 대구역 대합실 간이의자에 앉은 채로 잤다. 꼬부린 자세로 고통스레 밤을 새며 죄없는 새벽추위만 원망하길 2년째.

용역회사에서 하루 일거리라도 있는 날은 그야말로 운 좋은 날이었다. 그런 날엔 거금 5천원을 들여 '나이트'(24시간 사우나)에서 몸도 씻고 피곤도 풀 수 있기 때문.

그런 김종인(37)씨에게도 이제 희망의 빛이 비쳤다. 20일, 2년간의 노숙자 생활에서 벗어나 지하철 대구역 앞 주택가 작은 방으로 이사한 것. 실은 이사라 할 것도 없었다. 이삿짐이래야 지난 2년간 늘 메고 다녔던 배낭 하나가 전부.

그 방은 노숙자 선배였다가 자립에 성공한 김철헌(43)씨가 물려줬다. 이 방을 얻은 뒤 작년 8월 재혼한 김철헌씨는 헤어져 있던 아들과 함께 살기위해 인근의 방 두칸짜리 사글세로 옮겼다. 이사하면서 5개월 기한이 남은 사글세방을 김씨가 사용토록 배려한 것이다.

꼬인 인생. 여기서 풀어야만 한다. 김씨는 이제 김철헌씨가 그랬듯 이 방에서 자립의 꿈을 키워나갈 작정이다. 80만원짜리 사글세 방 하나를 두고 노숙자 두 명의 자립 대물림이 이루어지는 현장이다.

이때까지 그에게는 참기 어려웠던 고통의 세월이 있었다. 경기도 가평이 고향인 김씨가 대구로 흘러들어온 건 지난 2000년 5월. 4남2녀 중 셋째였지만 고향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서울에서 IMF 한파를 맞고 대방동노숙자 쉼터에서 4개월간 생활하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대구까지 일자리를 찾아 왔다.

"용역회사에서 일당을 받으며 일하기도 했지만 매일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새벽 추위와 싸울 수밖에 없었죠. 한심한 처지를 한탄하며 술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외로움에, 괴로움에 하루 소주 여덟병을 비운 적도 있었다. 인생 망가지는 것이 한순간이구나, 싶었다.

점차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간다고 느낄 즈음 "아직 젊은 나이에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서운 바람까지 불어 춥던 어느 날. 저녁을 먹기 위해 무료급식소를 찾았다가 손을 호호 불어가며 자원봉사하는 대학생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어린 학생들도 이 추위에 남을 위해 저렇게 고생하는데 도대체 난 지금 뭘 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술부터 멀리했다. 이대로 인생 낙오자가 될 수는 없다는 오기도 생겼다. 그렇게 자립의지를 키우고 있던 그에게 김철헌씨가 같이 일을 해보자고 권했다.

실내 인테리어를 하기 전에 건물을 깨끗이 비우는 일종의 철거작업이었다. 일은 힘들었지만 열심히 했다. 쉬는 날엔 용역회사를 찾아 일당을 벌었다.

"고정적으로 할 일이 있다는 게 제일 좋아요. 힘은 들지만 2개월여 만에 70만원을 모았죠. 5개월 뒤엔 내가 번 돈으로 방을 구해 독립할 계획입니다"

김씨가 노숙탈출의 희망을 가지기까지는 주위의 도움이 컸다. 칠성2가 자율방범대 김무근(52) 대장은 무료급식소를 찾을 때마다 김씨를 격려해줬다. "몸 좀 깨끗이 씻고 다녀라" "술 좀 그만 마셔라"이런저런 잔소리(?)도 잊지 않았다. 그에게 '자립의 방'을 물려준 김철헌씨도 이제 겨우 노숙생활을 탈출했을 뿐이다.

새로 가정을 꾸리고 생활에 안정을 찾으려면 멀었지만 재기를 위해 몸부림치는 노숙자들을 보면 남의 일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김철헌씨는 노숙으로 숙식을 해결하던 어느날 인감증명을 떼주면 돈을 주겠다는 말에 속아 빚더미에 올라앉게 됐다. 그 인감으로 정작 자신은 꿈도 못꾸던 자동차를 두 대나 사갔고 몇천만원의 대출까지 해갔다. 그 사건으로 은행의 부장까지 구속됐지만 아직까지 빚을 갚으라는 독촉에 시달린다.

그는 왜 배우고 힘있는 사람들이 못배우고 힘없는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최소한 '못된' 배운 사람들같이 살지는 않겠다는 원칙은 세웠다. 김씨에게 방을 넘겨준 이유이기도 했다.

노숙 탈출을 위해 애쓰는 김종인씨의 꿈은 분식집 주인. 식당 주방 일을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은 있다. 이대로 2년 정도만 고생하면 포장마차 형태의 분식집도 가능할 것 같다. 새해를 맞아 노숙자 김씨는 차곡차곡 희망을 쌓아가는 중이다.

박운석기자 stoneax@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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