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시론-지식모라토리엄 선언문

어느 대학 도서관에 갔다. 각 층 복도마다 책들이 널브러져 있거나 마구잡이로 쌓여 있었다. 그 와중에 학생들은 뭘 복사하는지 복사하고 책을 쌓아 놓는다. 과일장사들도 과일을 단정하게 정리해 파는데 이건 책인지 책더미인지 아니면 아예 쓰레기더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도우미들에 의해 다시 서가에 꽂히기는 하겠지만 그 풍경은 '책의 고려장'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책이 과일만도 못한 처지로 추락했으니 말이다.

책만이 아니다. 시내의 도서관은 공공성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도서관이 아낙네들 서예장으로 탈바꿈되는 현실을 보면 도서관이 사적인 모임의 장소를 제공해주고 있다는 생각에 기가 찰 따름이다. 구정 연휴 때 서울 교보문고에 들른 적이 있다.

책방에 몰려든 수많은 인파들 때문에 발디딜 틈이 없었고 그 풍경은 한 마디로 난장판이었다. 만화쪽 코너는 유치원(?)으로 변해 만화책 읽는 아이들로 우글대고 있었고 북적대는 인파에 햄버거, 커피 파는 곳이 뒤섞여 있었다. 책방인지 도떼기시장인지 알 수 없는 혼합공간. 인문학이나 철학 코너에는 파리만 날리고 수험생코너나 학습참고서, 경영 처세술 코너 쪽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벤치마킹하고 베낀 책들이 상당할 터인 어린이 코너에서 신기한 듯 눈망울을 굴려가며 책을 뒤적이는 아이들을 보고 스스로 질문을 던진다. 우리에게 지(知)는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비유컨대 거리에 먹자골목은 넘쳐나고 유흥업소는 부지기수이며 책방은 전쟁터인지 도떼기시장인지로 변해 있고, 대학의 심장부인 도서관이나 공공도서관에는 책이 없으며 대학생들이 도서관에서 만화를 읽고, 수만명이 고시촌에서 도를 닦고 있는 '울' 나라에서 지가 생산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불성설일 터이다.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라는 책의 제목과는 반대로, 사람들은 '절대로' 영어공부만 하고, 대학은 비즈니스권력의 파수꾼으로 추락하여 강의실은 비디오방이나 콩나물교실로, 대학 캠퍼스는 거대한 영어학원 혹은 순전한 취업알선센터로 전락한 현실은 이제 강건너 불구경 꼴이 되어가고 있다.

언론은 그런데도 우리의 지적인 현실을 양적으로만 판단한다. 국내대학을 외국의 유수대학에 견준다든지 도서관 장서를 비교한다든지 국제학술지 등재 횟수를 비교한다든지 하면서 말이다.

게다가 그런 이야기도 인문학은 아예 고려대상에서 제외되어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모두 자연과학에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지의 정도를 숫자로 나타내는 것은 케인즈적인 발상일 뿐이며 드러커식의 지식생산에 공모하는 일일 뿐이다.

그 전에 제도적이고 질적으로 우리의 지는 이미 파산선고를 한 지 오래되었다는 절절한 인식이 필요하다. 국회의원은 저마다 한 사람이 헌법기관임에도 불구하고 가렴주구의 주범으로 추락한지 오래고 대학은 저마다 지(知)의 생산기지임에도 불구하고 수량화된 '식(識)만의 전당'을 추앙해가고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는가? 먼저 대학생이든 시민이든 각종도서관에 한 사람에 한 권씩 책을 신청하는 운동이라도 벌이자. 그게 다 시민들 각자의 세금이자 등록금 아니던가. 한국사람은 책을 안 읽는다라는 말은 그저 신화일 뿐이다. BK21 사업으로 황폐해진 지의 공간을 복구하겠다고 하는 것은 공염불이 되기 십상이거나 지적생산능력에 엄중한 책임을 져야 할 기존 지식인들을 과신한 결과일 뿐이다.

또한 인문학적인 지식의 생산역량은 거점 운운하는 중앙집권적인 발상에서 결코 나오지 못한다. 그것은 밑으로부터, 스스로 지식생산기지임을 자각해야 할 지식인들 주위로부터, 물적 제도적으로 자극을 받아 다양하게 생산되는 지식공동체에서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경제적 IMF에 이어 지식모라토리엄의 터널을 영영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이득재·대구가톨릭대 교수·노어노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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