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도 쉬어 넘는 고개라 해서 조령(鳥嶺)이라 이름했다나. 경상북도 문경과 충청북도 괴산 사이의 소백산맥을 가로지르는 새재. 가까이 이화령이나 죽령 등 굵직굵직한 고갯길은 진작에 아스팔트 길로 바뀌어 차량들 차지가 된지 오래다.
그러나 새재는 여지껏 흙길인 채로다. 여전히 사람이 주인이다. 옛적 그대로의 산길이다.쉬엄쉬엄 걸어 오르는 길을 따라 줄곧 아늑한 숲이 이어진다. 아직은 겨울의 충충한 겉옷을 걸치고 있지만 순식간에 푸르름이 뒤덮을 것이라 생각하니 저절로 즐겁다.
제주의 꽃소식이 벌써 반도 남녘을 간지를 이즈음 내륙 깊숙이 자리한 새재 계곡에도 얼음장 사이로 맑은 물이 졸졸졸 소리를 낸다.
새재의 첫 관문 주흘관(主屹關)에서 나들이가 시작된다. 1관문에서 2관문 조곡관(鳥谷關), 3관문 조령관(鳥嶺關)까지는 약 20리길(지도상으로는 7km). 2관문까지는 평지나 다름없는 평탄한 길. 2관문을 지나면 딱 걷기 좋은 경사의 오르막길. 무료해질만하면 나타나는 옛 주막, 기기묘묘하게 생긴 바위, 상처난 소나무, 옛 과거길, 소원성취탑, 그리고 각종 표지판.
2관문, 3관문 근처에는 약수터가 있다.1관문의 성벽에 올라서면 새재의 지세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험준한 암봉들은 동서 구분없이 우뚝하고, 산자락 아래의 골짜기는 길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내려 있다. 이 골짜기를 가로 막고 진(陣)을 친다면 수만의 대군도 쉽사리 막아낼 법한 지형이다. 그래서인지 예로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평가되었다.
TV드라마 '태조 왕건' 촬영팀의 버스가 천년전 고려개국 당시와 21세기 현대의 안방을 연결해주는 타임머신처럼 관광객들 사이를 휙휙 지나간다. 왕건 세트장은 1관문을 지나 왼편으로 2만여평 부지위에 자리잡고 있다.
고려, 백제궁 2동과 기와 41동, 초가 40동이 들어선 국내 최초의 '고려촌'이다. 학생들과 가족단위 관광 인파가 눈에 익숙한 모습의 고려시대 가옥들 틈을 이곳저곳 파고 든다. 저러다 정말 고려시대로 되돌아가 살아가게 된다면 다행일까, 불행일까. 중세 수도원을 발굴하던 고고학자가 중세로 되돌아간 클라이튼의 소설 '타임라인'과 왕건 세트장이 겹쳐지면서 시공을 뛰어넘는 드라마의 인기를 실감한다.
다시 2관문. 1관문에서 2관문까지는 3km. 바위에 눈길을 주다보면 계곡을, 계곡에 눈길을 주다보면 숲을 놓치기 일쑤다. 거기다 옛 길손들이 다리품을 쉬어가던 조령원터, 신구관찰사의 교인처(交印處) 교귀정, 다듬지 않은 돌에 '산불됴심'이라 한글로 새겨 놓은 표석이 보인다.
조선 조정에서 세 관문의 노출을 막기 위해 화전과 벌채를 엄금했다는 조림정책 덕일까. 이제는 기막힌 산책로를 갖게 되었으니2관문이 가까워지면 풍광은 더욱 수려해진다. 기암괴석과 늠름한 소나무, 그리고 맑은 계곡물이 한데 어우러져 그야말로 선경을 이룬다. 그러니 아무리 갈 길이 바쁜 나그네라도 잠시 쉬어갔을 법 하다. 2관문 조곡관 주변의 풍광을 새재의 세 관문 중에서 으뜸으로 치는 이유이다.
2관문을 지나면서부터는 인적마저 뜸해진다. 녹지 않은 눈길이 또한 길을 망설이게 한다. 많은 관광객들이 이쯤에서 발길을 돌린다. 옛날에는 도적떼와 산짐승이 날뛰었다니 아무리 담대한 장정이라도 절로 오금이 저렸을 성싶을 만큼 한적하다.2관문에서 3관문까지는 3.5km.
소나무 숲이 갈수록 무성해진다. 삼림욕이 따로 없다. 아리랑비를 지나면 이진터(二陳址). 임진왜란 초기 새재를 넘고자 지금의 진안리에 진을 친 왜군과 대치한 신립(申砬)장군이 처음엔 농민 모병군 제1진을 1관문부근에 배치하고 제2진의 본부를 이곳에 설치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신립장군은 천혜의 요새 새재를 내주고 충주 탄금대로 이동하여 배수진을 쳤다가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3관문 턱밑에는 장원급제길이다. 선비들이 장원급제를 꿈꾸며 한양으로 넘나들던 옛길 그대로다. 영남은 물론 호남의 선비들까지 굳이 먼 길을 돌아 이 길을 택하도록 하였다는 길이다. 3관문을 나서면 충청도 괴산땅. 20여리 시간여행이 여기서 끝을 맺게 된다.
잘 꾸며 놓은 공원같은 산길. 옛사람들의 자취를 좇다보면 발길은 저절로 고갯마루로 향한다. 이 길을 짚어 가다보면 어느새 자신이 과거보러 가는 나그네가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노진규기자 jgroh@imaeil.com
▨가는 길=①대구~중앙고속도 서안동IC~예천(34번 국도)~문경~문경새재.
②경부고속도 구미~상주(중부 내륙고속도)~문경.
▨가볼만 한 곳:▶문경새재박물관=새재 관문을 본 따 주흘실, 조곡실, 조령실로 전시실이 나눠져 있다. 문경새재의 유래와 전설에서부터 선조들의 생활 모습, 도자기, 고문서 등이 전시돼 있다. 지상 2층 지하 1층에 소장자료는 4천200여점. 연중무휴. 054)572-4000.
▶문경석탄박물관=가은읍 왕릉리로 가야 한다. 석탄산업 변천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전시실과 야외전시장, 갱내전시실이 있다. 입장료 어른 770원, 어린이 330원.동절기 오후 5시까지 개관. 054)550-6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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