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세계의 유일한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아랍 현대문학의 대부'로 불려지는 나기브 막푸즈(90). 언제나 서민적이고 수수한 그는 1988년에 노벨상을 수상한 이후에도 평소 즐겨찾던 카페 '엘 피샤위'에 변함없이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러나 7년 전 그의 목숨을 노린 한 이슬람원리주의 신봉자가 휘두른 칼에 목을 상한 후로는 바깥출입조차 자제해야할 처지가 됐다.
이스라엘과 평화조약 지지
이 피습사건은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당시 이집트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주면서 그의 문학작품들을 다시 한 번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은 나기브 막푸즈의 글이 이집트사회의 어두운 면을 지나치게 부각시킴으로써 이집트와 이슬람세계의 명예를 훼손시켰다고 주장했다.
어쩌면 이는 노벨상이 불러온 화근인지도 모른다. 대부분 그의 작품들은 노벨상 수상 이전에 씌어졌기 때문에 당시 이슬람 원리주의자의 습격을 '세계 언론을 의식한 테러'로 보는 시각도 있다. 또한 사다트 전 대통령과 함께 이스라엘의 평화조약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레바논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랍국가에서 그의 작품은 금서로 묶여져 있다.
평생을 '문학'이라는 외로운 길에 몸바쳐온 노작가를 만나기로 한 시간이 가까워지자 필자의 마음은 긴장되기 시작했다. 전세계의 언론인들이 막푸즈를 만나기 위해 카이로에 오지만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필자도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나 초조하게 기다리던 답변은 긍정적이었다. 어쨌든 막푸즈를 만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필자는 흥분됐다. 마치 어려운 시험을 치르고 난 수험생이 합격소식을 들은 것처럼.
올 90세…자택주위 철통경비
나일강변 그의 아파트주변은 온통 사복·정복 경찰관들로 삼엄하게 둘러싸여져 있었다. 필자가 아파트 정문으로 다가가자 한 경찰관이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그리고 경찰관이 인터폰으로 연락한 후에야 쇠창살문이 열렸다.
아파트에 들어서니 이미 우크라이나 국립방송국의 TV카메라가 인터뷰촬영을 하고 있었다. 막푸즈는 노쇠한 모습이 역력했지만 '인류를 위한 마지막 봉사'라는 사명감으로 버텨내는 듯 보였다.
우크라이나방송팀이 떠난 후 필자의 차례가 왔다. 통역자 살마위씨가 "한국사람"이라고 소개하자 그는 "먼 곳에서 왔군"하며 필자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앙상하게 말랐지만 수십 권의 책을 쓴 손이다.
그는 테이블 위의 이집트 전통음식들과 오렌지주스를 가리키며 먹으라고 권했다.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가 손자를대하듯 다정스러웠다. 주스도 마시고 단과자도 조금 맛보았다.
필자는 그와의 보편적인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일반적인 질문부터 시작했다. "지금까지 32편의 소설과 13편의 단편소설 모음집을 출판했는데 이 중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책이 있다면 어느것입니까".
"'카이로 트릴로지'(삼부작) 중 첫 편과 '하라피쉬'를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내소설들의 형식은 서구소설의 형식이지만 내용은 완전히 다릅니다. 서구소설에서는 실험적인 형식도 있지만 우리 소설형식과는 맞지 않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습니다".
답변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유럽과 미국편향의 동아시아세계에서 막푸즈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역으로 이집트나 중동세계에서 동아시아문학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동양문학을 접했거나 영향을 받은 적이 있는지요"."인도문학에 심취한 적이 있었는데 특히 '타고르'를 읽고 많은 감명을 받았지요. 파키스탄문학도 많이 접했습니다".
"혹시 한국이나 중국, 일본문학을 접해본 적이 있는지요"."아랍어로 번역된 중국 대중소설과 일본소설은 읽어봤습니다만…"."이들 동양문학에서 다른 점을 발견했다면 무엇입니까".
"동양문학과 서구문학의 차이가 엄청나다는 사실은 확인했습니다만 아랍문학과 동양문학의 차이를 논하기 위해선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점을 꼽으라면 동양문학이 '재미있다'는 점입니다".이제 그의 삶에 대한 질문으로 주제를 바꾸었다.
전세계서 인터뷰 요청 쇄도
"당신의 문학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고대 이집트의 파라오시대 역사를 소설로 쓰고 싶었습니다. 이것을 쓸 수 없었던 것이 크게 후회됩니다".
고령탓인지 인터뷰 도중 그는 눈에 띄게 지쳐가고 있었다. 통역을 하던 살마위씨는 "특별히 한국사람이 왔다고 선생이 무리하고 있다"며 '그만하자'는 눈짓을 보내왔다. "세계의 수많은 언론인들이 그를 인터뷰하려고 찾아오지만 아무런 얘기도 듣지 못한채 사진만 찍고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선생은 아주 드물게 말문을 연다"고도 했다. 아마도 '먼 동방사람'이라는 점 때문에 필자에겐 말문을 열었던 모양이다.
'살람 알레쿰(평화가 함께 하기를)'이란 아랍의 인사말과 함께 그의 집을 나서기전 인류문화를 위해 평생을 바쳐온 그의 메마른 두 손을 다시 한 번 부여잡았다.
하영식 youngsig@otenet.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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