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일등 시.도로 가는 길-(8)대구.경북 정책협력 부재

#1. "이건 아닌데…. 합치는 게 맞지 않을까?" 지난해 대구전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한 박람회에서 문희갑 대구시장은 이렇게 말 했다고 한다. 대구 공동상표인 '쉬메릭'과 경북 공동상표 '실라리안'이 경쟁이나 하듯 나란히 부스를 맞대고 각기 상품을 전시하고 있는 부스 앞에서였다.

대구시가 쉬메릭을 선보인 것은 98년이다. 96년 명칭을 확정하고 디자인과정을 거 쳐 그 이듬해 제품을 출시했다. 현재 21개 업체가 17개 품목에 쉬메릭 상표를 부 착해 시장에 내놓고 있는데 최근 3년간 내수 370억원, 수출 1천114만달러를 기록 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지원된 대구시 예산은 15억4천만원. 앞으로 대구시는 매년 3억원씩을 투입할 계획이다.

실라리안은 이보다 늦었다. 97년 브랜드 이름이 정해졌고 2000년 하반기 제품이 출시됐다. 17개 업체가 참가하고 있으며 지난해 매출은 내수 22억원, 수출 3억원 이었다. 지금까지 8억원을 들인 경북도 역시 앞으로 매년 5억원을 지원할 계획이 다.

브랜드 1개를 띄우는 데 거의 천문학적인 경비가 들어간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됐 다. 하지만 대구시나 경북도의 공무원들은 이에 아랑곳없다. 본사는 대구에, 공장 은 경북에 있는 업체가 많고 대구에서 경북으로 빠져나가는 업체도 많으며 쉬메릭 과 실라리안의 품목이 거의 겹치지만 대구는 쉬메릭, 경북은 실라리안 해서 딱 금 을 그어버렸다.

이 문제에 관해 부산시와 경남도는 다른 행보를 보여주었다. 부산시가 '테즈락'이 란 공동상표를 내놓자 경남도는 대응을 하지 않았다. 단지 경남지역 특산품인 농 수산물 가공품의 해외 판매에 주력했을 뿐이다.

#2. 영남권 내륙화물기지(복합화물터미널)사업은 대구, 김천, 칠곡 등 세 지역이 사업 유치를 놓고 7년간 민관 총력전을 벌인 국책사업이었다. 95년 건설교통부로 부터 예정지로 선정됐던 김천은 99년 칠곡으로 후보지가 변경될 조짐을 보이자 범 지역적으로 맞섰다. 칠곡은 98년 감사원에 의해 김천의 후보지 부적합 판정이 나 오자마자 적극적인 유치운동에 나섰다.

가장 '인상적인' 움직임을 보인 곳은 대구시였다. 내륙화물기지사업이 추진되고 있는데도 별도의 종합물류단지 조성계획을 세워 96년부터 밀어붙였다. 종합물류단 지 사업자를 구할 경우 내륙화물기지로 인정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2000년까지 내륙화물기지사업 자체를 유보시키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세 지방자치단체는 교통개발연구원 용역 결과 자기 지역이 최적지로 나왔다고 강변하는 데 바빴다. 대구경북 전 지역에서 가장 경쟁력이 높은 곳이 어 디인지를 토론하는 자리는 한번도 갖지 않았다. 계명대 박병춘 교수는 이를 두고 "세 지방자치단체가 용역결과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지역이기주의 때문"이라고 분 석했다.

대구시가 추진해 온 종합물류단지사업은 현재 사업자가 나서지 않아 전면 재검토 단계이고, 내륙화물기지사업 역시 사업자 구하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지금까지 대구시와 경북도가 협력하는 시스템이 아니었다는 데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듯하다. 앞서 보여준 세 사례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점에도 판단이 일치할 것 같다. 그리고 이같은 시스템으로는 지역발전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주 장도 많은 동의를 받을 것이다.

"'유럽 합중국'이란 얘기가 나오는 판에 대구 따로, 경북 따로라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입니다. 정치.경제.문화적 기반을 공유하고 있는 마당에 지역발전계획을 제각각 세우는 게 과연 비전과 효율을 담보할 수 있을까요?" 대구경북개발연구원 이정인 지역개발실장의 진단을 들지 않더라도 말이다.

아예 희망이 없을까? 최근 몇몇 사례를 보면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3. 지난 21일 대구시청과 경북대 총장실. 포항공대 정진철 부총장과 나노기술산 업화지원센터 정윤하 총괄센터장이 찾아와 나노기술 개발사업에 대구시와 경북대 가 참여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사업은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나노산 업 지원사업의 가장 핵심 프로그램으로, 만일 포항공대가 사업을 따게 되면 "단군 이래 대구경북에 가장 많은 연구비가 지원되는" 것으로 알려진 사업이다. 포항공 대 계획으로는 9년간 2천억원을 투자해 10년 이내 나노분야에서 세계 톱에 랭크되 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포항공대 정 부총장 일행이 이날 대구에 온 것은 나노분야로는 전국에서 가장 우 수한 연구인력을 갖고 있다는 경북대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대구시에도 얼 마간의 사업비 지원을 요청했다.

포항공대가 사업비를 구하지 못해 이렇게 나선 것은 아니다. 범대구경북적인 사업 체계를 갖춤으로써 국내에서만큼은 확실한 우위를 점하겠다는, 이른바 전략적 제 휴인 것이다. 이 사업에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등 이 경쟁에 나서 치열한 3파전을 벌이고 있다.

박찬석 경북대 총장은 이에 대해 요청받은 5억원의 두배인 10억원을 지원하는 동 시에 영남지역 주요 대학 총장들을 모아 이 사업에 협력하도록 돕겠다고 화답했다 . 대구시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경북대 지종기 교수는 "주요 사업, 그것도 대형 국책사업에 광역자치단체들과 대 학들이 서로 협력하는 진귀한 선례가 탄생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4. 한방산업화사업에도 대구와 경북이 손을 맞잡았다. 경북에 대학본부가 있는 경산대는 최근 이번이 마지막인 RRC(지역협력연구센터) 선정을 위해 대구와 협력 체계를 갖췄다.

RRC는 현재 전국에 45개가 있는데 정부는 올해 마지막으로 5개를 선정하겠다는 계 획. 그만큼 경쟁이 치열해서 평균 3대1을 넘길 것으로 내다본 경산대는 대구와 협 력해 한방생명자원연구센터라는 RRC를 신청할 방침이다. 대구시와 경북도가 연간 1억원씩을 내고 경산대가 4억원, 기타 기업들이 조금씩 분담한다는 내용이다.

이게 성공하면 대구시와 경북도가 합심해서 RRC를 유치한 첫 케이스가 된다. 대구시는 또 한방바이오산업 개발사업의 하나로 계명대에 전통천연물산업화센터를 두면서 그 분원 형태로 효능검정원을 경산대 한의대에 설치할 계획을 세웠는데 여기에도 경북도가 지원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5. 안동시청은 이달초 의성군청과 공동으로 광역상수도사업을 벌인다고 발표했다 . 두 시.군청이 160억원을 공동 투자해 안동 제2정수장에서 의성읍까지 40㎞ 길이 의 송배수관로를 설치해 안동 상수돗물을 의성에 공급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안동은 상수도시설의 가동률을 높여 생산원가를 절감할 수 있고 의성 은 별도의 정수장 없이 상수를 공급받아 이익을 볼 수 있다.

지금까지는 ㄱ시 따로, ㄴ시 따로, ㄷ군 따로 하는 식으로 지방자치단체별로 상수 시설을 갖춰 비효율을 자초했었다.

이 사례들에서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익이 되니까 협력한다는 지극히 단순한 이치가 그것이다. 포항공대가 경북대에 협조를 구한 것은 결국 사업 유치를 위해 선 제휴하는 게 최선이기 때문이다.

한방바이오산업에 대구시와 경북도가 협조하 는 것 역시 시는 경산대 한의대의 우수 인력을, 도는 약령시장을 비롯한 시의 인 프라를 필요로 한다는 증좌다.

대구와 경북은 사실 산업분야 협력체계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구미 테크노산업단지, 칠곡 하이테크 벨트, 대구 성서산업단지를 첨단산업벨트로 연결하는 것이 우선 과제다.

"삼성이나 LG가 수도권에 있는 연구소를 공장이 있는 구미로 이전하겠다고 하자 연구원들이 모두 사표 내겠다고 맞서 무산된 적이 있 어요". 대구경북개발연구원 이정인 지역개발 실장은 이젠 대구와 경북이 어떻게 역할 분담을 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협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구의 문화산업과 경주 첨단문화산업단지 계획, 안동과 문경을 잇는 문화벨트도 따로 구성해선 경쟁력이 약해진다고 이 실장은 덧붙였다.

#6. 1950년대의 노스캐롤라이나 주는 미국에서 가장 못 사는 곳이었다. 1인당 소 득은 전국 최하위였고 기업들의 연구개발활동도 미약했다. 대학을 졸업한 이들은 취직할 곳이 없어 대부분 다른 지역으로 유출됐다.

이때 등장한 이가 주지사인 L 호저스였다. 그는 더램, 채플 힐, 랠리라는 세 곳을 주목했다. 더램에는 듀크대학이, 채플 힐에는 노스캐롤라이나대학이, 랠리에는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이 있었는데 이 세 대학은 우수 인력을 배출하고 있었다.

호저스 주지사는 세 지역의 중간지역에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RTP)라는 대규모 연구단지를 설립했다. IBM, 국립보건연구원 환경보건과학연구소 등 거대기업과 국 립기관의 연구기관들이 속속 입주했다.

현재 이곳에는 50개 거대기업의 연구기관 을 비롯해 136개 조직이 운영되고 있으며 최대 5만2천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세 지역의 소득은 미국 전체 1인당 평균소득의 93%에서 107%로 뛰어올랐다.

지역협력에서 중요한 이는 지방자치단체장이다. 위 사례는 주지사를 비롯한 주정 부의 지역혁신 노력이 어떤 결실을 맺을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오히려 지방자치단체장 때문에 협력이 안 된다는 비판이 적잖았다.

영남대 김시영 교수는 "지금까지 지방자치단체들간 협력이 잘 안됐던 이유는 직선 단체장들이 자신의 정치적 역량 약화를 우려한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이를 뛰어 넘으려면 협력하는 게 도움이 된다고 자각하는 주민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대구경북개발연구원 이 실장은 "주민들의 자치역량이 함양되지 않은 마당에 행정 단위를 넓히든 좁히든 의미 없다"고 단언했다.

대구와 경북이 통합하든, 협력하든 어떤 형태로든 공동선을 추구하느냐, 쓸데없는 경쟁논리에 휘말려 소모적이고 비효율적인 개발을 추진하느냐는 시도민 모두의 몫이라는 결론이다.

이상훈기자 azzza@imaeil.com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