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酒聖)'으로 꼽혔던 시인 조지훈(趙芝薰)은 '술꾼'을 9단으로 나눴다. 취미로 마시는 애주는 '주도' 1단, 맛에 반한 기주의 경지는 '주객', 진경을 체득한 탐주는 '주호', 폭주의 경지는 '주광', 삼매에 든 장주는 '주선', 술과 인정을 아끼는 석주는 '주현', 유유자적하는 낙주는 '주성', 즐거워 하되 마실 수 없는 관주는 '주종', 술세상을 떠나게 된 폐주가 마지막 9단이다. 그는 한 술자리에서 4단(주광) 정도인 후배 시인 김관식이 행패를 부리자 따귀를 때려 기강을 잡았으며, 주광은 주성의 질책을 달게 받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한의서에도 적당히 마시는 술은 양약이라 했다. 하지만 정도가 문제다. 술 마시는 데 취미를 붙인 '주도'에 이르면 이미 '술꾼' 소리를 듣는데 그때부터가 문제다. 그 다음 단계에 들면 패가망신의 지름길로 접어든 셈이며, 마지막 '열반주'는 죽음에 이르는 술이다. 지나친 음주는 술꾼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가정과 사회의 건강을 해치고, 국가 경제까지 좀먹게 한다.
▲프랑스의 주간지 '텔레라마' 최근호가 기사 '밤마다 취하는 한국인들'에서 우리의 음주문화를 신랄하게 꼬집었다. 노동부가 3년 동안 매일 80g 이상의 알코올(위스키 4잔에 해당)을 직업상 마시면 재해에 포함시킨 문제를 두고 한해에 소주 22억병을 마시는 나라에선 많은 양이 아니라는 비아냥이다. 직장 상사 따라 술집을 도는 게 의무이며, 잘 마셔야 승진 기회도 많으며, 별도 예산을 준비할 정도로 음주는 기업문화의 일부라고도 비판했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우리의 술 소비량은 슬로베니아에 이은 세계 2위다. 대학생들마저 10명 중 9명(92%)이 월 1회 이상 음주(남 94.4%, 여 89.2%)해 미국의 86%보다 훨씬 높고, 전체의 46%나 음주 뒤 기억이 끊어진 '블랙 아웃' 경험자이며, 남학생의 48.4%는 주 1회 이상 폭음한다는 조사도 나왔다. 이 조사에서는 대학생들의 한 차례 음주량도 술 종류에 상관없이 7잔 이상이 40.9%로 가장 많으며,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이는 경우도 13.2%(남 18.2%)로 나타났다.
▲공자(孔子)는 음주에 대해 언급하면서 '각자의 건강이나 기분에 따라 적당히 마시되 취해서 문란함이 없어야 한다(酒無量 不及亂)'는 교훈을 남겼다. 우리 사회에서 술을 추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잘못된 음주문화는 바뀌어야만 한다. 술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과음으로 이어지고, 그 결과 갖가지 사회 병리현상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결국은 '열반주'를 든 조지훈도 '술이란 취한 뒤보다 취하는 과정이 더 좋은 법인데 그 진미를 거세할 양이면 애당초 술을 포기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태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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