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봄의 소리

봄은 남쪽 바다에서 온다. 두어 해 전 젊은이들과 어울려 진도에 있는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찾아가는 길에서 본 남해의 봄바다를 잊을 수가 없다. 추운 겨울 동안 어둡고 우울하기만 했던 바다 빛갈이 가까이는 연두빛으로 더 멀리는 남청으로 밝게 빛나면서 사람들을 포근하게 맞이해 주던 남해의 봄바다였다.

맑은 햇살과 풋풋한 바람에 실려오는 봄기운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봄은 머지않아 또 한번 강산을 덮으리라. 계절의 변화는 어김없는 것.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이 자연의 섭리를 아무도 거역할 수 없다.

그런데 봄이 와도 봄같지 않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무엇에 체한 듯 가슴이 답답하고 이래서는 안되는데 하는 착잡한 심경을 가눌 수가 없다. 우리를 이렇게 불안하고 심란하게 만드는 원인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나라를 다스리는 이른바 위정자들에게 있다.

외환위기 이후 국민은 직장과 가정을 잃고 노숙자가 되어 유리걸식하고 있는데 국민의 세금에서 나온 돈으로 온갖 부정과 비리를 일삼았다고 하니 이러고도 나라를 맡아 다스리는 책임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윤리적일 수 있는 것은 양심이 있어서 부끄러움을 알고 염치가 있기 때문이다. 시정의 범부도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할 일을 구별하고, 자기 분수가 무엇인지를 헤아릴 줄 아는데 자칭 이땅의 지도자라고 하는 부류들이 자기 분수를 모르고 국민의 마음에 상처만 입히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러움을 모르고 염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봄이와도 봄같지 않다

지금 우리 앞에는 할 일이 산적해 있다. 우선 눈앞에 다가온 월드컵대회와 두 번에 걸친 큰 선거에서부터 또 우리가 선진지식사회로 나가는 길목에서 치루어 내어야 할 수많은 시련과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시련을 이겨내고 우리가 다시 한번 변화하기 위해서는 국민 각자가 차분히 자기 분수에 맞은 소임을 다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사회에서 책임있는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솔선수범하는 길밖에 없다. 정치인은개인이나 파당의 이해(利害)를 떠나 국익을 우선하는 정치를 해야하고, 기업인은 투명한 경영을 해서 그 과실을 근로자와 함께 나누고, 지식인은 자기 분야에서충실하게 소임을 다하는 기풍을 보일 때 우리 사회는 건강한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해마다 이맘 때면 섬진강을 끼고 하동으로 들어가는 십리 삼발치에는 매화가 흰 눈발처럼 만개한다. 어디를 보나 온통 매화 꽃밭이다. 매화는 그 기품과 향기로 보면 눈 속에 꽃망울을 터뜨리는 설중매가 가장 좋지만 봄철에 피는 매화도 그만 못지 않다. 매화나무 아래 앉아 옷깃에 지는 그윽한 향기를 받으며 꿀벌이 잉잉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새삼스레 삶이 여유와 생기를 되찾는다.

삶에는 이만한 여유가 또한 필요한 법. 사람이 각박한 현실에만 매여 살다가 보면 그 영혼도 시들어 한 모서리가 이지러지고 그늘을 드리운다. 영혼이 생기를 잃고 시들하면 삶이 온전할 수가 없다. 타성적으로 그냥 끌려가는 죽은 삶이 되기 쉽다.

오늘 우리 사회는 세계화다, 경쟁력이다 해서 앞만 보고 무서운 속력으로 달려나가고 있다. 그래서 마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만이 최고의 미덕인것처럼 여기는 세상이 되었다.

세계 속에서 우리가 제몫을 하려면 과학기술 분야뿐만 아니라 각자의 소임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해야 함은 불가피한 사실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세계적인 경쟁력이 무엇을 위해서 있는가를 깊이 성찰해야 한다. 타인이 경쟁과 이해의 대상으로만 비쳐질 때 거기에 인간의 마을은 없다. 경쟁이 빚어내는 비정하고 메마른 불모지가 앞을 막아설 뿐이다. 그것을 어찌 우리가 바라는 인간의 세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름다운 조화의 관계 배우자

매화꽃이 여기저기 제자리를 지키면서 활짝 피어나 봄의 향기를 자랑하듯이 우리의 삶도 각자가 제자리에서 자기의 개성과 재능을 발휘할 때 우리 사회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인간의 마을이 된다. 삶은 관계이다. 네가 있으므로 나도 있다.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 사람 사이에 관계는경쟁과 이해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는 이웃의 관계이다.

사람은 이웃에게로 나아가려는 아름다운 성품이 있다. 서로 떨어져 있는 외로운 섬처럼사람은 고독한 존재이다. 그 고독을 벗어나려고 사람은 타인에게로 자신을 열어놓는다. 그러한 관계는 살벌한 경쟁의 관계가 아니라 아름다운 조화의 관계이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봄의 소리에 길을 기울여 보자. 때묻은 우리들 생활의 문턱에서 조금은 비껴서서 붉게 피어나는 꽃들과 푸르게 돋아나는 새잎이 소리없이 외치는 봄의 생명의 소리를 들어보자.

권국명(대구가톨릭대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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