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원로화가의 봄-지역 서양화단 대부 정점식 교수

그날 날씨가 무척 차가웠다. 8일 오전 노(老)화백은 바바리 코트깃을 세우고 약속장소에 나타났다. 지역 서양화단의 개척자인 정점식(85)계명대 명예교수. 그는 적지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특유의 꼿꼿함과 강단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전에도 몇차례 만난 적이 있지만, 반세기 이상 대구화단을 이끌어온 그와 인터뷰를 하는 것은 무척 즐거웠다. 그는 요즘 몸이 좋지 않다고 했지만, 또렷한 목소리와 곧은 자세로 1시간여동안 끊임없이 미술에 대한 열정을 쏟아냈다.

근황부터 물어봤다. "나이가 들어 오래 작업하기가 힘들어요. 올해 전람회(개인전)를 한번 하려는데 건강이 어떨지…". 이번에 개인전을 열면 열일곱번째가 된다고 했다. 요즘 활동하는 작가들에 비해서는결코 많은 횟수가 아니다. "횟수보다는 좋은 작품을 보여주는게 중요하지. 예전 작가들은 1, 2차례도 못한 이들이 많아".

80년 가까이 붓을 잡아온 노화가에게 '미술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한번 던져봤다. 그는 동서고금의 사례를 두루 인용하면서 미술에 대한 정의를 명쾌하게 들려줬다. "만약 화가가 장미와 소녀를 그냥 아름답게 그린다면 미술은 될 수 있겠지만, 예술은 될수 없지. 20세기초부터 예술은 심미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인간 내부의 문제를표현해왔어. 자신의 내부에 있는 열정을 발산하는 과정이지".그의 예술론은 거침이 없었다.

"30년전 죽은 현대미술의 개척자인 마르셀 뒤샹은 '예술의 가치를 정보가 관리한다'는 말을 했지. 예술이 자본주의 기구의 하위개념에서 존재하는 있다는 얘기지. 요즘 작가들은 기계, 물질문명, 산업구조 등에 종속된 작품을 만들어내는데 너무 익숙해있어". 그는 만화같은 그림을 만들어내는 화단의 경향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노화가의 '인간 우선주의' 선언에 무척 공감이 갔다.

우리는 일제시대부터 활동해온 작가들의 작품을 자주 봐왔다. 산과 들, 인물 등이 등장하고 인상파 야수파 등 서양의 여러 화풍을 옮겨온 듯한 그림들이 아니었던가. 이 부분에서 팔십넘은 작가가 난해한 듯한 추상미술만 해왔다는 것이 흥미롭다.

사실 그는 50년대 한국모던아트협회에서 활동하며 초창기 추상미술 운동을 이끌어온 일세대 작가다. "흉내내는 작가는 예술가 취급을 받을 수 없는거야. 예술가라면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독창성을 추구하는게 당연하고, 항상 자신에대한 '결단력'이 필요하지. 30년대말 일본 경도시립회화전문학교에서 큐비즘과 다다이즘과 같은 새로운 사조를 처음접한게 출발이었지".

그가 어린시절 고모부에게 붓과 먹으로 서예, 문인화를 배워온 것이 현재의 바탕이 돼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얼핏 추상미술과 수묵화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지만, 그는 '수묵화같은 서양화(추상화)를 그린다'는 얘기를 자주 들어왔다고한다. 검은색이나 황색 화면을 배경으로 거침없이 휘갈린 듯한 붓자국과 현란한 수직.수평의 선(線)에는 수묵화 정신이 깊게 배어있는 듯 하다.

"추상미술이 어렵다고 하지만, 작가의 내면과 시대적 흐름을 알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해요. 예전에 몬드리안도'빨간.노란색, 그 뒤에 숨어있는 숨소리를 다른 사람들이 못 알아준다'는 불평을 했죠".40년 가까이 계명대에 재직하면서 그에게 배운 제자가 수천명이 넘고, 교수가 된 제자도 60,70명쯤 된다.

인터뷰 말미에 후학들을 위한 충고를 부탁했다. 역시 '영원한 스승'다운 얘기를 들려줬다. "젊은 작가들은 머리로만 그림을그리려고 해. 작가는 가슴이 있어야 하고, '쟁이'가 돼야 해…".

박병선기자 la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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