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하는 오후

미류나무 손금 타고 흐르면서 생각한다.

강의 끝은 어딜까.

맨발에 실려서 아픈 눈을 뜨는 봄,

잎들은 줄을 열고 길눈을 뜨고 있다.

하나 피고 둘 피는 빗줄기의 휘파람 속

땅을 차고 땅을 여는 나무들이 올라온다.

말없는 천 번의 갈림길

마음도 길 밖으로 건너뛰는 봄날

산울음 감아지고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골짜기,

그리움의 물살 속을 첩 첩으로 돌아간다.

짧은 봄볕 타고 돌아와 갇힌 설익은 우리의

사랑이야기, 봄날의 마음 밭에 무너지고 이어진다. 천리 또는 만리 앞의

한길 지나 두길 건너 낯설고 낯익은

미류나무 손금을 타고

-이옥진 '미류나무 손금 타고'

시 읽기는 내용을 좇아가면서 읽는 방식과 이미지를 따라가면서 읽는 방식이 있다. 리얼리즘 시는 내용을 좇고, 모더니즘은 이미지를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이 시는 앞의 두 범주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묘한 서정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봄비가 온 후 잎들이 '줄을 열고 길눈을 뜨고 있다'는 표현은 시인의 예민한 촉각을 느끼게 해준다. 봄볕 타고 온 사랑이야기가 무너지고 이어지는 것은 비단 이 시인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곧 봄이 미류나무 손금을 타고 온다.

김용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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