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하는 오후

축구중계에서 두 선수가 엉켜 쓰러졌을 때,

누구의 반칙인지 관중들은 잘 모른다

슬로비디오로 보면

선수의 순간 동작이 천천히 재연된다

결정적인 동작은 정지화면으로 보여준다

빠르고 정교한 동작으로 심판과 관중을 속였지만

카메라의 앵글은 벗어날 수 없다

그대는 빠르다 20년 동안 살던 집에서 2시간만에 이사를 가고

20년 동안 꿋꿋하게 버티던 그대의 집도 단 2분만에 무너져

평지가 된다 10년 동안 몰래 익혀온 사랑도 감쪽같이 지워버린다

순간동작으로 사람들은 그대의 무너진 집도 그대의 사랑도

전혀 보지 못한다 그대는 그대의 재빠름 뒤에 웅크리고

심판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오판을 기다리는 것이다

-구석본 '슬로비디오'

발상이 독특한 시이다. 아마 쇼트트랙 '김동성 사건'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이 시는 그러나 우리 인생의 철리(哲理)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1연에서 카메라 앵글은 누구일까? 하느님? 부처님? 아니다. 시인 자신의 양심일 것이다.2연은 그 자체로 한편의 좋은 시이다.

자본주의의 속성인 비인간적인 '속도'에 대한 비판으로 읽힐 수 있지만, 시 전체적인 면에서 보자면 역시 재빠름의 뒤편에 웅크리고 있는 어떤 판관에 대한 경의 표시인 것이다.

김용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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