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1950년대 말과 60년 대 초까지만 해도 산업화만 이룩되면 민주주의도곧장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믿은 적이 있었다. 이승만의 권위주의도 박정희의 독재정부도 경제성장이 몰고 오는 파고 속에 휩쓸려 사라질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 꿈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울산이 공업단지로,포항에 거대한 제철회사가 들어섰고 수출이 100억달러를 넘었는데도 민주주의는 여전히 먼 나라 이야기로만 들렸다.그 뒤에도 한동안 권위주의가 기승을 부렸고 인권은 유린되었으며 '국가 안보'라는 이름으로 온갖 억압이다 통용되었다. 그런데도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만은 저버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한 때는 헌법 개정으로 국민직선제 대통령을 선출하면 민주주의도 그 당장 실현될 수 있다는 기대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은 민주주의로 달려가는 유일한 통로처럼 주창되었다. 그 결과 마침내 문민정부도, 국민의 정부도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들어섰다.
민주주의를 위한 긴 투쟁을 치르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민주주의도 내용과 수준에 따라 차이가 있고, 가치로운 민주주의는 우리들 자신이 참 민주주의자로 자리잡을 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말이지 민주주의에도 수준의 차등이 있고 다양성이 있음을. 그리하여 영국의 민주주의와 필리핀의 민주주의가 같지 않다는 것을 알기까지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민주주의만 되면 '좋은 정치'가 저절로 이룩될 것이라는 기대는 허황된 환상이라는것을 지난날의 경험이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좋은 정치'를 이룩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제도의 하나가 민주주의라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속 편하다는 것도 체념에서 우러나온 지혜일 수 있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최근에는 좋은 정치로서의 민주주의는 시민사회에 그 바탕을 둘 때 비로소 이루어 질 수 있다는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국가 실패, 시장 실패'가 논의되는 시대 속에 이제 유일한 희망을 '시민사회'에다 걸고 있는 셈이다.
시민사회를 뒷받침하는 시민운동이야말로 좋은 정치로의 참 민주주의를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사회 없는 민주주의 없다'라는 주장이 그 나름의 설득력을 가지게 된 것 같다.시민사회의 주체인 시민이 공공성과 연대성을 바탕으로 하는 일상성을 강조하고 있다.
시민운동이 거세게 행해지고, 잠자고 있었던 시민권의 일대 각성이 일어난다고 해서 곧장 시민사회로 발전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시민사회의 기본은 공공성과 자발적 연대성이 자리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결여한 시민운동이나 시민사회는 그것에 값할 수 없는 한낱 '그들만의 잔치'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시민사회는 개개인의 사회적 삶이 공공성에 바탕을 둔 자발적 연대성으로 이어질 때라야 가능할 수 있다. 공공성은 바로 공적인 사회영역을 확립하는 것이라 해도 좋다.
더 쉽게 말하면 법과 질서를 지키면서 윤리적 자아를 확립하는 삶이라 할 수 있다. 더 좋고 의미 있는 일을 위해 다함께 손잡으려는, 그리하여 공공성에 바탕을 둔 자유로운 연대성 이야말로 시민사회적 시민으로서의 기본 자세라 할 수 있다.
시민사회와 공공성을 생각하면서도 지하철 매표소 앞에 줄 하나 제대로 서지 않는, 그리고 길거리에 마구 버려진담배꽁초를 바라보게 되면 지금 우리의 현실이 어디쯤 와 있는가를 가늠하게 된다.
무슨 게이트라는 말로 천문학적 금액을 뒷거래하는 현실과의 그 묘한 대조에 우리의 시민사회가 발붙일 수 없는 동토의 대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된다. 시민사회를 이룩하지 못한 가장 기본 요인은 민주주의를 외치면서도 게이트를 일으키는 그들의 행태 때문이다.
그것은 공공성과 윤리적 연대성을 잃어버린 단지 무늬만 민주주의자에 불과한 천민주의자들의 행진일 뿐이다. 바로 그들 때문에 이 땅에 시민사회도 민주주의도 '좋은 정치'로 자리잡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이화여대 교수.정치학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김세환 "아들 잘 부탁"…선관위, 면접위원까지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