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뉴욕의 지저분한 거리. 훗날 천재 작가로 불리는 '장 미셀 바스키아(1960~1988)'는 주린 배를 움켜잡고 길거리의 벽에 낙서화를 그리며 미술가로서의 성공을 꿈꾼다.
어느날 그는 식당앞에서 자신이 만든 그림엽서를 단돈 몇센트에 팔다가 우연히 팝아트의 대가 '앤디 워홀'과 유명 미술상 '브루노 비숍벨거'를 만나게 된다. 그는 그림엽서 몇장으로 무명화가의 재능을 단번에 간파한 그들의 도움을 받아 공식 화단에 진입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
27세의 나이로 요절한 미국 흑인화가의 일생을 그려 96년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에 노미네이트된 영화 '바스키아'의 한 장면이다. 신표현주의의 대가이자 바스키아의 동료였던 '쥴리앙 슈나벨'이 메가폰을 잡아 화제를 모았던 영화이기도 하다.
이처럼 무명화가와 가난은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향토출신 화가 변종곤씨의 얘기.
"뉴욕에는 전세계에서 몰려든 수천, 수만명의 화가로 북적댑니다. 상당수는 웨이터 점원 막노동꾼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며칠간의 먹을거리를 구해놓은뒤 며칠동안 아틀리에에 틀어박혀 작업만 합니다. 양식과 물감이 떨어지면 또다시 일자리를 찾아 나서길 되풀이합니다. 언젠가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죠".
그도 80년대 초반 미국에 처음 건너 갔을때 접시닦이 청소 등 막일을 하면서 "한국에 편히 있을걸, 왜 이국땅에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을까"라는 후회를 수도 없이 했다고 털어놨다.
그래도 성공한 화가의 고생담(談)은 아름다운 추억일 수 있다. 상당수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것이 예술가의 삶이 아니던가.
멀리 가지 않더라도, 국내 화가들의 고생담도 술자리에서 자주 회자되는 메뉴다. 40,50대 화가들이 둘러앉으면 "참 그사람, 얼마전만 해도 고생많이 했는데 요즘은 꽤 괜찮아졌어"라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젊을때 일자리도 없고 먹고 살 것이 없어 여자친구가 던져준 돈 1천원으로 먹고 산 화가, 전업을 하기 위해 교직을 그만두고 고생만 한 화가, 부인이 장사를 해 근근이 먹고 산 화가, 아직도 정처없이 동가숙 서가식하는 화가… (요즘 화가들은 예전보다 고생을 덜할 수도 있다.
학원, 화실 등을 운영하거나 강사생활 등으로 그런대로 먹고 살수는 있지만, 화가의 본업인 작품활동에 전념하기도 어렵다)
한 원로화가의 얘기. "예전에도 그랬지만 상대적으로 미술대학 학생중에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 무척 많아요. 남학생이 여학생에 비해 심하고, 그중에서 그림에 소질있는 학생은 더더욱 가진 것이 없어요. 그 이유를 생각해봤는데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 힘들어요…". 화가에게 '가난'은 떼낼수 없는 굴레인지도 모르겠다.
박병선기자 la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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