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하는 오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집'

2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시인의 시이다. 따라서 이 시는 그의 죽음과 흔히 연결된다.삶에 대한 열망을 상실하고, 더듬거리며 문을 잠근다는 표현이 죽음을 예감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과잉해석의 혐의가 짙다.

차라리 이 시는 실연(失戀)의 시이다. 사랑을 잃고 시인은 쓴다. 실연을 당하고 번민할 때 밤은 얼마나 짧고, 눈물은 얼마나 망설임 없이 흐르던가? 그때 내 사랑은 홀로 빈집에서 또 얼마나 외로울 것인가.

김용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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