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내고장 명소-성주 임풍루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무수한 인명이 살상당하고 또 승패와는 상관없이 정신적 물질적인 피해를동반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몽골 침입과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특히 임란으로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됐다.

성주목읍지.경산지 등 사료에 따르면 성주에는 임풍루(臨風樓)가 있었는데 규모나 아름다움에 있어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에 버금가는 누각으로 영남 3대 누정으로 불리었다한다.

이 임풍루는 임란때 불타 다시 재건되지 못했지만 조선초 대학자 정인지가 남긴 기록에는 세조가 즉위(1455년)한 후 목사로 있던 이중(李重)이 누각을 짓고 정인지에게 누각의 이름과 기문(記文)을부탁해 이름을 '임풍'이라 했다.'임풍'은 그동안 새 누각을 짓기 전에는 객관과 주사(州司)가 붙어 있어 답답했으나 넓은 곳에 주사를 짓고 누각을 새로 지으니 '시원하게 틔어 있다'는 뜻이란 것.

당시 임풍루는 폐 사찰에서 가져온 재목으로 병졸들을 동원해 지었는데 단청을 칠하니 아름답고 높직하여 꿩이 날개를 펼친 듯하고 새가 날아오르는 듯하여 우뚝한 모습이 장관이 되었다고 전한다.또 이곳에서 신하가 막힌 마음을 틔우고 정신을 상쾌히 하며 시를 읊고 호연지기를 가꾸는 장소로 때론 악기를 연주하고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사용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임란으로 큰 피해를 입은 성주읍성이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되지 못한 관계로 임풍루도 재건립되지 못했는데 당시 상황을 알려주는 읍기도에 의하면 객사의 북쪽은 지금 벽진방향이며, 관가아래 형성된 마을이라는'관하리'란 지명에 견줘 볼 때 성주초등학교 뒤쪽 언덕위에 임풍루가 있지 않았나 추정할 뿐이다.

성주.박용우기자 ywpar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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