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 매체는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생활뿐 아니라 정신문화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 체제 이후 급격한 사양길을 걸어 왔으며, 독자들의 외면이 날로 극심해지고 있어 비관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형편이다.
지구촌 곳곳에서는 이미 총 소리도 없는 문화 전쟁이 불을 뿜고, 그 열기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을 정도다. 할리우드의 영화 한 편이 가져다 주는 고부가가치는 우리를 놀라게 하는 차원을 넘어선 지 오래다. 그러나 영상 산업은 상대적으로 인쇄 매체의 위축을 부르고 있으며, 이 때문에 문화가 가벼움 쪽으로 치닫고 있는 현상마저 두드러지고 있다.
영상 매체는 오랜 세월 동안 인쇄 매체가 제공하던 재미와 영향력을 빨아들이면서 '공룡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다양하고 화려한 매체 환경에서 책은 딱딱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문명사적인 전환'의 여파이기도 하겠지만, 활자 매체를 축으로 하는 출판문화가 그 역할의 상당 부분을 영화·텔리비전·컴퓨터 화면 등에 넘겨 주고 있는 현실은 결코 간과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영상 매체의 급부상과 맞물리면서, 고학력 시대가 가속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인구는 엄청나게 줄어들고 있는 모양이다. 베스트 셀러의 개념만 하더라도 이 사실을 극명하게 말해 준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수십만 부가 팔려야 그 대열에 얼마간 머물 수 있었는데, 지금은 10분의 1 수준인 수만 부 대로 떨어졌으며, 하락세가 여전하다고 한다. 국제통화기금 체제 이후 인문·사회과학 단행본들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 가운데 신간 출판이 해마다 1천만권씩이나 줄어들고, 서점들도 20%나 문을 닫았으며, 출판사의 10% 정도만 신간을 내놓고 있다고 하지 않은가.
◈책을 멀리 하는 사회
여전히 각종 잡지들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도 하지만, 지속력과 경쟁력이 있는 경우는 그야말로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생겼다가 없어지고 또 생겨나지만 부가가치와 연결되지 않아 좌초하는 악순환만 거듭되고 있을 따름이다.
문화는 인류가 남긴 위대한 유산이며, 지금도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 속에는 삶의 고귀하고 다양한 무늬들이 새겨져 있다. 인간만이 지니는 문화는 가치 지향적이며 미래 지향적일 때, 건전하고 보다 나은 삶을 지탱해 주고 이끄는 견인력을 지닐 때, 그 빛이 더해지며 우리의 삶을 고양시켜 준다. 그러나 진정하고 순수한 문화는 변두리로 밀리고, 병들고 부도덕한 문화가 우리를 에워싸면서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거품과도 같은 유행이나 지나친 상업주의도 폐해를 낳기는 마찬가지다. 잘못된 유행이나 상업주의에 젖은 문화는 마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가치 지향적이며 미래 지향적인 문화를 흔들고 썩게 하며, 날로 속도가 붙고 있는 건 아닌지…. 문화는 과도하게 포장되기 시작하고, 돈벌이에 기울어지면서는 퇴화하면서 썩는 냄새만 풍기게 마련이다.
◈정신문화 황폐화 불러
교보문고의 지난 3월 한 달 서적 판매량이 무려 161만5천여권으로 서적업계 사상 월 매출 최고액인 185억원을 기록했다는 보도는 이 같은 비감에 젖어 있는 우리의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 책들을 눕혀 쌓을 경우(1권당 두께 평균 2㎝) 높이가 3만2천300m나 돼 63빌딩의 130배에 이르며, 무게로 환산(1권당 700g)해도 1t 트럭 1천131대 분량이나 된다니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출판계는 여전히 책이 팔리지 않는다고 아우성들이니 출판·서점가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만 가속화될 뿐이라는 말인가. 이 낭보는 반가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출판문화를 되짚어 보게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굳건히 정신을 드높이고 소중히 여기는 사회, 보다 나은 가치를 추구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문화의 시대'를 열 수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구태의연한 아날로그적 발상이기만 할까.
출판문화가 살아 남고 우리의 정신문화가 상승작용을 하려면 달라진 문화적 환경에 대한 '반발의 정신'을 강력한 동력으로 삼는 지혜와 슬기가 요구될는지도 모른다.
교보문고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의 서점가가 흐뭇해 하고, 출판인들이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정신적 인프라 구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자긍심과 소명감을 보상받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어진다.
이태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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