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겨울, 구 소련 KGB 부의장이었던 보브코프씨를 모스크바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소연방 붕괴와 함께 스물 한 살 때부터 45년간 일했던 KGB를 갓 퇴임하면서 출간한 그의 회고록, 'KGB를 움직인 사람들'을 소재로 첩보영화를 만들기로 하고 그 제작권을 매일신문이 독점하는 계약체결을 위한 만남이었다.
사흘간의 협상 끝에 겨우 사인을 받아냈으나 그 후 영화는 할리우드의 '스티븐 시걸'쪽 제작 관계자와의 협의과정에서 끝내 성사되지 못한 채 아쉽게도 미결로 남아 버렸다.
뜬금없이 KGB 고위정보책임자의 해묵은 회고록 이야기를 꺼낸 것은 최근 경선을 싸고 번지는 거짓말 논쟁과 함께 현정부 집권 후 늘어나고 있는 '통신감청'에 대한 께름칙한 분위기 때문이다.
보브코프가 그의 회고록에서 '우리 방첩요원들의 용서 받을 수 없는 실패이며 동시에 미국 첩보원의 의심할 바 없는 성공'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뼈아픈 기억으로 꼽은 사건은 KGB본부에서 해외첩보기구로 연결된 극비 지하 전화선이 도청 당한 사건이었다.
회고록에서 언급할 정도로 도청에 대해 민감했던 그도 일반대중에 대한 도청에 대해서는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나라(소련)에서는 대중도청이라고는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분명히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이 글을 쓴다. 개인 주택 등에 도청류의 방법은 금지돼 있었고 어느 정부기관도 이 명령을 어길 권리가 없었다'.
근년들어 햇볕정책 속에 국내 감청건수는 오히려 65%나 더 늘어났고 감청 대상도 개인 e메일, 휴대폰 문자 메시지, 음성사서함까지 감청 되는 추세를 보면서 KGB조차 '대중에 대해서는 도청 없었음'이라는 회고를 상대적으로 생각케 된다.
도청 감청에 있어서 국가간 첩보차원의 도청이든 국내 공안상의 감청이든 국가 자주권이나 인권이 침해되는 만큼 상대적으로 국익과 공익이 뒤따를 경우 어느 정도 부도덕한 방법의 정당성이 인정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 감청이 느는 만큼 감청에 의해 얻어진 국익과 공익의 성과는 감청증가만큼 비례되고 있는지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국익과 공익의 성과가 국민들에게 설명되거나 인정되지 않은 채 감청만 계속 늘어나는 걸 알게 되면 불안과 불신, 불필요한 의혹만 생겨나게 된다.
휴대폰 1천만대 시대에 살고 있는 국민들로서는 께름칙한 분위기 속에서 주눅들며 통신의 자유를 침해당하고 싶지 않다.지금 감청을 늘리고 있는 국민의 정부는 감청 성과로 얼마나 많은 유익한 국익과 공익을 얻어내고 있을까?
요즘 몇년 사이 간첩 잡았다는 뉴스를 본지가 까맣다는 얘기들을 듣는다. 과거 정권시절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릴 일이 있을 때 국면 전환용으로 간첩사건을 터트린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간헐적으로 일망타진 기사가 나오곤 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런 기사가 거의 보이질 않는다.
간첩검거 기사가 없는 것은 못 잡거나 잡고도 공작상 안 밝히거나 아니면 없거나 세 가지 경우일 것이다. 없다면 다행이고 잡고도 공작상 안 밝힌다면 그 또한 정보기관에 대한 신뢰를 계속 지닐 수 있어 좋다.
다만 있긴 있는데 감청까지 늘리고도 못 잡는 경우라면 문제다. 물론 감청이 전부 대공 분야만은 아니다. 그러나 공익이나 국익을 충분히 얻어내지도 못하면서 국민들의 통신 자유와 사생활만 위축시키고 감청을 늘리는 정부라면 문제가 있는 정부가 된다.
거짓말을 자주 하는 사람일수록 남도 거짓말할 거라는 의심이 많게 되고 남의 말을 더 엿듣고 싶어하는 법이다. 거짓말과 말 바꾸기가 심한 지도자들이 많은 조직도 마찬가지다.
감청이 늘어난 정부니까 그 정부의 조직층이 그러한 엿듣기 심사에 빠진 거 아니냐는 얘기가 아니다. 공익우선을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지금 여당 경선을 둘러싸고 서로 거짓말이다, 말 바꾸기다, 들었다, 못 들었다 다투며 어수선하고 분열된 나라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국민들이 볼 때는 지극히 반 공익적인 싸움이다.
노무현씨가 거짓말쟁인지 이인제씨가 어거지 쓰는 건지 '감청'을 안 해봤으니 알 수는 없지만 누군가는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대통령 후보와 지지그룹의 정확한 사상과 인격검증은 필요한 국익 내지는 공익일 수 있다. 그렇다면 국익과 공익을 위해 대선 때까지 그들의 낮말과 밤말을 감청해 보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언론과의 전쟁을 선언했듯이 통신자유와 인권침해를 들고 나오면서 '감청 기관과의 전쟁'이라도 선포할건가.
-김정길 본사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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