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이익과 주장이 맞부딪칠 때 처음에는 대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지만 종국에는 합리적인 논리로 상대를 압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판단의 결정적인 '잣대'인 합리적인 논리를 상대방이 수용하지 않을 경우 난감해진다. 이럴 때는 합일점없이 평행선을 계속 그릴 수밖에 없는데 결국에는 목소리 큰 쪽이 득을 보는 이상한 모순에 빠진다.
요즘 지역경제계의 화두(話頭)이자 키워드(key word)인 '지방분권'을 보면 이같은 평행선의 '패러독스'가 새삼 떠오른다. 지방분권이라는 단어만큼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그 색깔이 달라지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간단히 말하면 지방분권은 '중앙집권'에 대한 상대적·반대적 개념이다.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사회·문화 심지어 최근에는 정보·두뇌까지 중앙에 집중돼 있으니 이를 지방으로분산시키자는 발상이다. 여기서 말하는 중앙은 우리나라의 경우 서울 지역이 아니라 수도권(首都圈) 전체를 의미한다.
지방분권의 논리는 간단하다. 우리나라가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중앙집권적 체제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즉 중앙과 지방이 동반 상승하기 위한 윈-윈 전략이다. 그런데도 지방분권을 마치 중앙이 지방을 도와주는 '구걸'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지방분권에 가장 두드러기 반응을 보이고 있는 곳은 바로 수도권이다. 수도권에서는 분권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수도권 지역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인식하고 있는 경향이 강하다. 더 한심한 쪽은 정치권이다. 지역의 목소리가 강하면 분권관련 정책을 대증요법식으로 내놓았다가 여론이 숙지면 눈치껏 접어버리는알량함이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지방분권은 무슨 정치적 '흥정거리'나 '기브 앤 테이크'식의 거래 대상이 아니다. 한국이 반드시 나아가야할 방향이요,정책적인 목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중앙집권 방식이 경제적 효율성이 높은지, 지방분권이 더 효과적인지에 대한 거시적 연구가 없다.
그래서 서로단점을 들춰내는 네거티브논쟁으로 비화되기 십상이다. 예를 들면 중앙집권은 지역균형발전을 저해하고 수도권의 과밀·혼잡비용을 증대시키며, 지방분권은 오히려 수도권의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식이다.
이러다보니 정책 당국도 혼란스런 모양이다. 현 정부는 출범초기 통치의 기본 철학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에 두고 그 6대 이념 중의 하나로 '중앙집권을 지방분권으로 바꿀 것'임을 명확히 선언했다.
그러나 지금 그 이념이 사장(死藏)된 지는 오래 됐으며 심지어 최근에는KDI(한국개발연구원)조차 '비전 2011 프로젝트' 에서 "정부가 수도권 투자를 억제하면 기업이 공장을 지방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해외로 이전할 가능성이 있다"며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수도권 입지 규제를 풀고 수도권에서 발생한 소득의 일부를 지방으로 넘기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우기도 했다.
지방분권에 대한 경험이 없는 우리나라는 분권운동을 마치 국민적 단합을 해치는 행위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으니 점입가경이다.그렇다면 왜 분권인가. 한국이 성숙한 혁신 체제(innovation system)를 갖추려면 분권은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남의 우수한 모델을 따라잡는 케치업(catch-up)전략이었으나 이내 그 한계가 드러났다.
지식기반(knowledge-based)경제로 이행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없음이 이미 대내외에서 검증됐다. 이 지식기반경제 모델의 핵심은 나라 특유의 고유한 지식 체계, 네트워크의 다양한 연결, 그리고 지역혁신체제로 요약된다. 이 모든 것은 분권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이제 지방분권은 더 이상 지방민들의 넋두리가 아니다. 오히려 중앙이 앞장서 실천해야 할 과제다.
세조의 쿠데타로 팔도 방랑길에 오른 매월당 김시습은 어느 산에 들면 반드시 그 산에서 나는 나무와 그 산에서 잡은 짐승 심줄로 산금(山琴)을만들어 타고 다녔는데 그 음의 조화가 그 지역의 산과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었다고 한다. 매월당은 이미 지방분권의 우수성을 깨달은 것일까.때마침 대구·경북지방에도 지방분권운동 본부가 창립된다고 하니 이제 남은 것은 지역민들의 애정어린 관심이다. 매월당의 산금 소리가 새삼 그리워진다.
윤주태 논설위원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탄핵안 줄기각'에 민주 "예상 못했다…인용 가능성 높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