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시론-정보화와 정치개혁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정보화가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콘텐츠 개발면에서는 여전히 미흡하지만 초고속인터넷망의 구축이나 휴대폰의 보급, 전자상거래의 구현 등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앞선 사회에 속한다.

그 반면 사회의 기축이 되는 정치영역에서는 아직도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높은 정보화수준에 걸맞은 정치의 선진화가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기술결정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과학기술의 발전이 기계적으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일정한 사회변동을 낳는 것은 아니다. 특히 바람직한 사회변동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분명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의 폭을 넓혀준다. 때문에 과학기술은 사회변동을 추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열어주는 사회변동의 가능성은 저절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서 현실화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의 정보화수준과 정치수준이 따로 따로 노는 현상은 특별히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정보화가 정치의 선진화를 촉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잠재적 가능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선택과 행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 정보화와 정치개혁이 서로 손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엿보이고 있다. 그것은 정보화를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동시에 정치개혁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집단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치개혁을 추동할 수 있는 정보화의 잠재력을 행동을 통해 구체화시키고자 한다. 정보화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정치개혁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정치개혁의 가능성은 실종되어 버릴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정치개혁에 대한 열망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정보화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정보화가 정치개혁을 추동해내지 못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보화능력과 정치개혁 열망을 동시에 갖고 있는 집단으로 소위 386세대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정보화 능력을 이용해 낡은 정치를 청산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와 행동은 무서운 잠재력을 갖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평소에 가까이 지내고 있는 386세대의 몇몇 사람들과 만나서 정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이들은 이념적으로 특별히 진보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기성정치를 혁신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의지를 사이버공간에서 마음껏 분출하고 있음을 전해주었다.

그들에게 사이버공간은 이리저리 눈치보지 않고 정치개혁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며 서로간에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매우 의미있는 공간으로 자리매김되고 있었다. '노사모'활동은 아마 그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까 한다.

노무현씨가 처음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섰을 때만 해도 선두주자로 부상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노무현씨가 선두주자로 떠오르는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작용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분명 386세대의 사이버공간에서의 활동이었다.

그들은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을 계기로 삼아 노무현이라는 인물을 띄움으로써 자신들의 정치개혁 열망을 거침없이 드러냈던 것이다.

노무현씨를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그가 유력한 대통령후보로 부상한 사건은 정보화와 정치개혁에 대한 관심이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는 데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산업화는 늦었어도 정보화는 앞서자'는 구호는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맹목적인 정보화는 우리가 가야할 길이 아니다. 부정과 부패로 점철된 낡은 정치를 청산하는 데 정보화가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면, 정보화의 역사적 의미는 크게 퇴색될 수밖에 없다.

높은 정보화 수준에 걸맞은,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는 일이야말로 제대로 된 정보화사회로 가는 길이다.

백승대 영남대교수 사회학과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