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혹은 목숨이란 것은 구멍에 달려있는지도 모른다. 입구멍으로 끊임없이 먹어야 살고 똥구멍으로 계속해서 싸질러대야 목숨이 이어진다. 어찌 보면 나일론줄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거미줄 같기도 한 생명줄이란 입구멍에서부터 똥구멍에 이르기까지의 긴 터널을 안전하게 확보하고 관리하는 데 달려있는지도 모른다.
그 긴 터널 중 어느 한 부분만이라도 막혀버리면 엄청난 고통이 따르고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이를테면 구멍을 잘 뚫고 잘 건사하는 게 행복의 지름길이다.
◈인간과 자연을 살리는 '구멍'
양방 중 내과는 그 구멍을 잘 뚫어주고 관리하는 데서 시작되고 끝이 난다. 한방 치료도 알고 보면 거의 대부분이 구멍을 뚫어주고 관리하는 데 의존한다고 할 수 있다. 구멍이 막히면 병들고 죽는다는 게 한방의 상식이다. 한방의 관점에서 보면 구멍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 보이지 않는 구멍을 잘 진단하고 관리해주는 한의가 명의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구멍은 몸에만 있는 게 아니라, 마음과 세상, 사회에도 있다. 정신과 치료란 바로 마음에 막힌 구멍을 뚫어주는 작업이다. 마음에도 구멍이 있어야 숨을 쉴 수 있는데, 현대인의 마음벽은 갈수록 콘크리트처럼 유리처럼 빈틈이 없어진다. 마음에 여백이 없어진다는 얘기다.
이윤추구의 도구가 되어버린 합리적 사고, 빈틈없는 논리적 사고로 인해 흙벽 같던 마음이 너나 할 것 없이 쇳덩어리처럼 굳어가고 있다. 마음 속에 여백이 없어지니 상대방이 들어와 놀 수가 없다. 내 속에 나만이 여러 명으로 분열되어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다.
마음에 구멍을 갖지 못하는, 돈밖에 모르는 합리적 사고 앞에 자연도 사회도 이 세상도 구멍을 잃어버리고 질식되어 가고 있다. 생태·환경문제란 산업화로 인해 잃어버린 구멍을 되찾자는 외침에 다름 아니다.
구멍은 구멍대로 살려가면서 산업화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이후 한국의 근대화란 구멍이란 구멍은 죄다 막아 가는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시인들이 그 구멍 많던 전근대를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생태시가 맹목적인 반근대로 흐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막히고 잃어버린 '구멍'되찾자
그러나 이러한 낭만적 동경은 경계해야 한다. 요새 대유행하고 있는 동양 유기론사상에는 사회학적 매개항이 결락되어 있다. 솔직히 나는 전근대로 되돌아가기가 죽어도 싫다. 오히려 나는 근대에 감사한다. 근대사회가 도래하지 않았다면 나는 감히 이런 지면에 글 한 줄 올리기는커녕 머슴이나 종살이하고 있었을 테니까.
다시 말해서 구멍은 구멍대로 살려가면서 근대화하자는 얘긴데, 인간의 행위에 따라 구멍은 줄어들거나 막혀서 없어지기도 하지만 자라거나 커지기도 한다. 바깥 세상의 구멍이 커지면 내 안의 구멍도 따라 커진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 안의 구멍이 먼저 커져야 바깥 세상 쪽의것도 따라 커지는 법. 즉 인간이 먼저 회복되어야 자연환경도 따라 회복되는 법.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구멍, 사회적 여백, 곧 대화의 통로가 뚫려져야 인간과 자연 간의 막힌 구멍이 회복되는 것이다.
자꾸자꾸 황폐해져 가는 저 플라타너스와 내 마음 사이 붉은 찌꺼기로 막힌 구멍을, 나와 당신 사이의 점점 막혀 가는 정신적 사회적 구멍을, 자본에 의해, 죄에 의해, 이기심에 의해 막혀 가는 구멍을, 내 힘만으로는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이 죽어가는 구멍을 되살릴 수 있는 궁극적 존재는 무엇인가.
구멍을 많이 확보할 수 있는 자가 끊임없이 가혹하게 앞으로만 향해 전진해야 된다는 시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지난 20세기 동안 우리는 계속 전진 또 전진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왔다.
1970년대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나와 같은 유신세대는 그러한 정신질병에 걸려있는지도 모른다. 시간은 곧 돈이다! 라는 사고방식, 이윤추구를 위해 인간의 고귀한 이성을 타락시킬 수 있는 잘못된 합리주의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근대이후 모든 진정한 예술이 추구해온 구원의 길이다.
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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