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도시의 거리에는 건물은 없고 다만 간판뿐이다. 상가(商街)에서는 아예 건물은커녕 거리마저 없어지고 오직 간판만이다. 현수막도 크게 한몫 한다. 일전에 어느 도시의 대학 앞 상가를 지나치는데 진짜로 온 빌딩을 간판으로 도배한 목불인견의 꼬락서니를 보았다.
정면의 길이가 눈어림으로 대충 십 여 미터가 될 건물은 도합 8층. 층마다 건물의 뼈대를 뺀 나머지 부분이 온통 유리였는데 그걸 거의 깡그리 간판이 싸 바르고 있었다.
마침 신호 대기 중이어서 대충 헤아려 보니까 층마다 수평으로 8 내지 10개의 간판. 거기다 건물 양옆의 벽면에 수직으로 달라붙은 게 또 층마다 2 내지 3.
도합, 무려 100여개 .
그것들은 좌우로는 서로 뭉그대고 상하로는 누르고 치받고 하며 용을 쓰고 있었다. '못 된 나무에 가시 많다더니!' 나는 뒤로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그때 마침 파란신호가 켜졌던지, 뒤차의 성급한 경적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서로 자기를 내세우고 나부대고 하는 간판의 꼴이라니, 혹 그 꼬락서니 하고 같은 한국 사회의 또 다른 국면은 없는 걸까? 자기 과시, 허세로 우쭐대는 그 '잘 난 것들...'.
요컨대 빈깡통 두드리기의 허장성세는 없을까? 없긴 왜 없어, 수두룩하다. 거리의 간판만큼 많다. 오죽했으면 '아유! 저 잘난 것!'이라는 볼멘 소리로 지지리도 못난 것을 사람들은 손가락질 했을라고! 스스로 잘난 척하는 걸로 거꾸로 못난둥이가 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못 먹는 씨아가 소리만 난다'고 한 바로 그 '못 먹는 씨아'는 쌔고 쌨다.
어쩌면 '못 먹는 씨아' 는 상당수 한국인의 관리와 경영의 수단인지도 모른다. 그건 사회의 곁에 나서거나 위로 올라서는 정도에 비례하고 있을 것도 같다. 그래서
한국은 '빈 수레 사회'다. 언젠가 간판 도배한 빌딩 꼴의 명함을 받은 적이 있다. 무슨, 무슨 장(長)에 이런 저런 위원까지 해서 명함 앞도 모자라서 뒷면에까지.
장이 하도 많다 보니까 거기엔 된장, 막장, 짜장에 하다 못해 송장도 끼어있었던 것 같이 기억하고 있다.
웬놈의 벼슬은 또 번주그레하게 별의 별 난 게 숱한지? 수탉 벼슬에다 하다 못해 암탉 벼슬, 병아리의 뭉구리 대가리에 난 벼슬까지.... 가만 있자, 그런 벼슬이 있든가 없든가?
기가 차서 멍해진 나를 뒤로 젖히고는 거들먹대면서 멀어져 가는 그의 등에다 대고 나는 야하게 궁시렁댔다.
'높디 높으신 교수님! 기왕이면 당신 집안의 가장(家長), 직함도 명함에 박으실 걸 그랬사옵니다'.
직함이 수다스러워서 사람이 가린 거나, 간판에 밀려서 건물 안 보이는 거나 그야말로 막상막하 아니겠는가 말이다.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미국 배우, 로빈 윌리엄즈가 특강을 하는 자리에서 웬 학생이 물었다. 혹 학위는 없냐고? '학위, 나 그런 건 없지만, 우리 집에 장식품은 수두룩해. 가령, 전등의 갓 같은 것'
이게 그의 명답이다. '대낮에 술이 취한 것도 아니고 정신이 나간 것도 아닌데 견장 차고 훈장 차는 사람, 그들은 어떻게 된 인간 종자일까?'
이건 일본이 자랑하는 천재 작가, 아쿠타가와가 한 경구(警句). 남의 얘기만 할 것 없다. 옛날 우리나라에서 웬 기생이 치장을 요상하게 하고는 나타났다. 누가 연고를 물었더니 한다는 소리가 조금 민망했다.
'나, 속엔 입은 게 없어서!'
이 기생이 오늘의 간판과 명함을 보면 제 세상 만난 듯 희희낙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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