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 에세이-봄의 강가에서

올해도 예년보다 열흘이나 빨리 꽃이 피었다는 소식이다. 이제는 꽃들도 인간을 닮아 제 삶의 속도를 잃어버리고 보다 빨리 피어난다.

빨리 피어난 꽃이 먼저 시든다. 어제 아침에 피어난 꽃들이 오늘 저녁에 이리저리 흩날린다. 꽃은 아름답게 낙화함으로써 존재적 완결성을 드러내지만, 인간은 꽃처럼 낙화하지 못하면서도 빨리 피어나고 빨리 이루고 싶어한다.

지는 꽃을 보고 강가로 나가 느린 강물을 바라본다. 강둑에는 사람들이 급하게 달리기를 하며 지나가고, 강변의 고가도로 위에는 자동차들이 재빠르게 달린다. 아무도 저 느린 강물의 내면의 삶을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저 강물도 저토록 급하게 달렸으리라. 산비탈 아래로 깊은 계곡을 지나 급하게 달리다가 들판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그 얼마나 정신없이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되었으리라.

강물은 이제 완만히 흐름으로써 비로소 새소리와 벌레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급하게 급류가 되어 흐를 때는 자신의 욕망의 물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물은 깊게 못을 이룬 곳에서 소리가 없는 법.

이제 저 강물이 느리게 느리게 바다에 이르면 제 이름조차 없어질 것이다. 만일 강물이 바다에 이르러서도 제 이름을 고집한다면 어떻게 바다가 있을 수 있겠는가. 욕심이 많으면 인생은 급류를 타고, 욕심이 적으면 인생은 냇물이 되어 완만히 들판을 흘러간다.

인생은 물리적 시간이다. 신이 우리에게 준 시간의 양과 질은 공평하다. 다만 신은 우리 각자에게 시간을 요리하는 재량권을 주었을 뿐이다. 어떤 이는 시간을 급하게 요리하다가 불에 태워 제대로 먹지 못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천천히 노릿노릿 알맞게 구워 맛있게 먹기도 한다.

여기저기 강변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나는 정작 낚싯대를 드리우지 않았는데도 바늘에 물리는 성질 급한 물고기는 아닌지, 그물을 치기도 전에 먼저 뛰어드는 물고기처럼 살고 있지는 않는지 야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본다.

어느새 멀리 강 건너편에 높이 올라가던 아파트가 완공되었다. 집을 저렇게 빨리 지어도 되는 것인지, 내 인생의 집 또한 저렇게 빨리 지어버린 게 아닌지 적이 두려운 생각이 앞선다.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고, 빠름은 부지런함이 아니다. 느림은 여유요 안식이요 성찰이요 평화이며, 빠름은 불안이자 위기이며 오만이자 이기이며 무한경쟁이다. 땅 속에 있는 금을 캐내 닦지 않으면 금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듯 내 마음속에 있는 서정의 창을 열고 닦지 않으면 창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초등학교 시절, 책보를 허리에 질끈 매고 소달구지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날들이 그립다. 언덕 위에 서서 내려다보던 엄마의 밥 짓던 저녁 연기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

밥짓던 엄마의 연기는 굴뚝을 빠져나와서도 재빨리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다. 천천히 저녁을 아름답게 하면서 감나무 가지에 앉았다가 지붕 위에 앉았다가 느리게 느리게 노을 속으로 사라져갔다.

정호승(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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