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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김영대 '유토피아는 없다'

김영대유토피아는 16C 영국 토머스 모어의 소설 제목에 처음 등장했다. 그 뜻은 이 세상에 없는 살기 좋은 곳이라니, 그 이중적인 표현 자체가 아이러니하다. 그래도 인간은 끊임없이 이상향을 추구해왔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의 공화국, 중국의 대동, 한국의 청학동은 물론, 이어도, 몽유도원도 등 문학이나 예술, 종교에서까지 살기좋은 터전을 꿈꿔왔다.

그 노력은 두 가지. 바로 현실 속에서 낙원을 만들고자한 경우도 허다하고, 아예 짐을 싸서 낙원을 찾아나선 경우도 있다. 신이 자연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하니, 현실적으로는 도시만들기 역시 유토피아를 향한 노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노력이 과연 성공했는지 의문스럽다. 살기 좋은 곳이란 그 터전이나 환경만 좋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혼자나 한 가족이 사는 모습은 결코 아니며, 어떤 모습이든지 함께 사는 방식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기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며, 급기야 자동차가 지배하는 오토피아라든지, 인간이 살기에 절망적인 디스토피아와 같은 표현마저 생겼다.

마천루를 뽐내는 거대도시든 오지의 촌락이든 결코 그 외형에서 유토피아를 찾을 순 없다. 즉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방식이나 함께 이루고자하는 사회모습 자체가 외부여건보다 더 중요한 탓이다.

거친 바다는 익숙한 사공을 만들지 못한다. 환경이 좋다고 해서 그 삶 자체도 좋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힘든 여건에서 위인도 나오고 명작도 탄생한다. 가방 크다고 공부 잘한다는 말은 아니란 듯이. 반대로 맹모삼천지교의 교훈처럼 좋은 환경찾기 또한 인간이 추구하는 기본권이 아닐 수 없다.

두 모습 다 맞는 말이다. 따라서 여건을 탓하며 좌절하고만 있을 수도 없으며, 터가 좋다고 우쭐대는 것도 우습다. 환경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결코 고운 존재가 아니다. 외화 메트릭스에서는 인간바이러스란 말까지 등장하지 않던가.

유토피아는 더 이상 홍당무도 아니고 파랑새도 아니다. 그 실현은 환경이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 달렸다. 허나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격차가 클수록 어렵다. 모듬살이의 지혜를 되살리자.

환경은 너무 거창하지 않게 기본을 이루고, 그 속에서 사람이 마음껏 살면서 인간정신을 추구할 정도면 족하지 않을까. 두레박을 함께 쓰는 두레마당의 의식을 되살릴 때다.

영남대 교수.환경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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