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된 노무현 후보의 역정은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다그는 1946년 경남 김해시 진영읍에서 10리쯤 떨어진 작은 농촌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기서 중학교를 졸업했고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상고 졸업 후 농협 시험에 떨어지고 작은 회사에 들어갔으나 변변치않은 월급에 실망해 고향에 돌아가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66년 10월 고졸 출신들에게 응시자격이 주어지는 '사법 및 행정 요원 예비시험'에 합격하면서 본격적으로 사법고시를 준비, 75년 제17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2년간 연수원 생활을 거친 후 77년 대전지방법원판사로 임용되었으나 78년 법복을 벗고 변호사를 개업했다.
조세전문변호사로서 평범한 생활을 하던 그는 81년 시국사건인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으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그는 이 때부터 시국사건 변론에 치중하면서 인권변호사로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85년부터 '부산민주시민 협의회'를 만들어 재야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고 '노동법률상담소'를 차리는 등 부산지역에서 민주화운동에 적극 나서 87년 6월항쟁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88년 그는 김광일 변호사의 추천으로 통일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13대 총선에서 부산 동구에 출마해 민정당 허삼수씨를 누르고 국회의원에 당선, 정치권 진입에 성공했다.
그를 국민 스타로 만든 것은 '5공비리 청문회'. 그는 정주영씨와 장세동씨 등 증인들을 대상으로 날카로운 추궁으로 일약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90년 3당합당에 반대, 꼬마민주당 창당의 주역이 됐으나 92년 14대 총선에서 처음으로 낙선의 고배를 들었다. 김대중 대통령과 인연은 꼬마민주당이 92년 김 대통령과 합당, '통합민주당'을 창당하면서부터다.
95년 6월 지방선거에서 노 후보는 부산시장에 도전했으나 다시 떨어졌다. 두번째 낙선이다.
95년 김 대통령이 정계복귀를 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노 후보는 민주당에 잔류하면서 김 대통령과 결별했고, 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에서 다시 낙선했다.
대선 직전인 97년 11월 국민회의에 입당, 김 대통령과 힘을 합쳤고 정권교체 후인 98년 7월 서울 종로 보궐선거에 출마, 국회의원에 재선했다.
16대 총선에서 노 후보는 부산에서 출마, 다시 떨어졌으나 2000년 8월 해양수산부장관에 임명돼 국가지도자로서의 수업을 쌓기도 했다.
서명수기자 diderot@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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