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규선 테이프 녹취록 요지

최규선씨는 검찰출두를 이틀 앞둔 지난달 14일 자신의 선산이 있는 전남 영암으로 가는 승용차 안에서 검찰출두직전 상황, 마이클 잭슨 내한공연과 관련한 사직동팀 내사 등에 대해 홀로 녹음을 했다고 7일 발매된 뉴스위크 한글판이 보도했다.

뉴스위크지는 그러나 "녹음내용은 검찰수사가 옥죄어 오는 상황에서 이뤄진 그의 일방적 주장인 만큼 과장됐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다음은 뉴스위크 한글판에 게재된 최씨의 녹취록 요지

△오늘 4월14일 일요일 아침에도 청와대 민정비서관 김현섭씨와 통화 했다. 그도 걱정을 많이 했다. "최규선씨 소환을 오늘쯤 해야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검찰 관계자가 묻던데 검찰도 별달리 나온 게 없어 곤혹스러운 것 같다. 그런데 제일 문제가 LA의 그사람(홍걸씨)에 관한 부분을 최규선씨가 어떻게 진술하느냐를 두고 검찰뿐만 아니라 청와대 그리고 모두가 떨고 있습니다".

김현섭씨의 말에 나는 "100만원짜리 수표 300장을 건넸는데 그건 수표였기 때문에 추적을 피하기 위해 정리하는데 시간이 좀 필요하다.소환을 좀 늦춰달라. 그래야 할 것 같다"고 부탁을 했다. 그러자 김현섭씨는 "아무튼 박사님. 나라를 살려주십시요. 나라를 살려야 됩니다. 박사님이 세우신 우리 국민의 정부가 아닙니까"하면서 나를 달랬습니다.

또 그제(4월12일)부터 이만영 정무기획비서관과 경찰청 특수수사과장 최성규, 또 2명의 국정원 직원들이 모여서 회의를 여러차례가졌다고 최성규씨가 나에게 말해왔습니다. "내용이 무엇이냐"고 묻자 "출국금지가 되기 전에 최규선이가 떠나버렸어야 했는데 출국금지가돼서 가지도 못하고 또 검찰에 출두하면 최규선의 말 한마디에 우리정권이 잘못되고 걱정이다라고 얘기하자 거기서 한 인사가(최성규씨가 누군지 이름은 말안했습니다) 부산에서 밀항시켜 가지고 밖으로 보내면 어떻겠느냐는 말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제가 "나는 밀항은 않습니다. 밀항하게 되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밀항하면 미국은 갈 수 있는 겁니까"하고 묻자 "미국은 갈 수 있다.일단 가버리자, 너가 정 혼자 나가기 그러면 내가 널 데리고 가주마"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오죽하면 이렇게 말할까. 나는 날 생각해서 말한 줄 알았더니 어제(최규선씨 측근들의 심야대책회의가 있던 날)는 최성규씨가(그분은나와 친분이 두터운 분입니다) 괴로운 눈빛을 짓더니만(정권이 날 설득하려고 그 사람을 내세운 것 같아요) 어제는 최성규씨의 부인까지 나서서"꼭 내남편이랑 같이 떠나달라. 2, 3년이면 된다.꼭 같이 떠나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내가 광주에 저녁 8시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 최성규씨가 김포로 가는 도중에 전화를 했습니다. "옆에 사람들이 있는 모양인데 공항에 도착해서 사람이 없을 때 꼭 전화를 주라"고 했습니다. 공항에 내려 전화를 해보니 "다 준비가 돼 있다. 규선아 떠나버리자"고 했습니다.

98년 9월9월 사직동팀에 이어 경찰청 특수수사과의 수사를 받을 때 당시 제1반 반장으로(그들은 4반 실장으로 부르죠) 최성규 현 특수수사과장이 있었는데. 그때 날 직접 조사했던 장본인이 최성규씨이고 김00 수사관입니다. .

그 인연으로 그때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은 후로 "널 골인 시키라고 해서 지시가 떨어졌는데 (골인은 구속을 의미한다) 제발로 걸어나간 놈은15년 특수수사하면서 내 생애에 너 하나뿐이다. 너 같은 놈은 내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했습니다.

나는 떳떳하고 또 김홍걸 부분도 내가 줬던 건 줬고 빌려준 건 빌려주고, 갚아준 건 갚아줬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나 그 아들인 김홍걸로부터 뭐하나 덕본 게 없습니다. 이권의 혜택? 아닙니다. 내가 김홍걸에게 돈을 줬던 것도 내가 정당하게 번돈이었지만 보험들려고 줬던 돈입니다. 워낙 나는 이 정권에 피해망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김홍걸에게 돈을 줬던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이 정권 탄생에 기여를 했습니다. 대통령도 97년 12월 20일 당선 직후에 저를 불러서 "창고가 비었네 자네가 나하고 나라를 살리세. 자넨그런 재주가 있고 능력이 있네. 내가 사람 볼 줄 아는데 자넨 정치적으로 대성할 것이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온힘을 다해 대통령 당선을 위해 노력을 했고 그후 IMF극복과정에서 김 대통령의 극복열정을 읽었습니다. 나에게 이러한 말할 수 없는 찬사를, 격려를, 힘을 불어 넣어준 것에 대해 나는 DJ를 존경을 넘어 신처럼 숭배하게 됐습니다. 온힘을 다해서 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왈리드 왕자를 그해 12월23일 서울로 데리고 오게 됩니다.

마이클 잭슨 공연 불발로 나를 구속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던 사람이 바로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이었던 이강래와 당시 국정원장 이종찬 이었습니다.당시 법무비서관이었던 박주선을 통하지 않고 바로 김세옥 경찰청장을 불러 노란 봉투를 주면서 "이 안에 내(이강래)가 국정원 기획실장으로 있으면서 가지고 있던 최규선 의혹에 관한 자료가 들어 있는데 골인 시켜라. 의혹만 밝히는게 아니라 이 정권의 골칫덩어리에게 맛 좀 보여줘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건 구속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1998년 6월엔 외자유치 리베이트설로 내사를 하더니만 7-8월부터는 마이클 잭슨 공연불발로 내사가 시작된 겁니다. 나로 인해 마이클 잭슨을 알게 된 수많은 사람들이 경찰청 수사과로 불려 가서는 "너 손해 본 것 있지"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마이클 잭슨의 북한 어린이 돕기 공연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전부 증언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윽박질러 마이클 잭슨 공연이 사기였다고 그렇게 엮어 넣어서 구속영장을 신청했습니다.

98년 9월9일 영장이 발부된 것을 계기로 박주선씨가 내 사건을 알고 발끈해 가지고 자기에게 보고도 없이 시작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안의 내용이 나를 엮어 넣기 위해 그랬던 것을 알게 됐습니다.

급기야 바로 그 다음해 1999년 6월25일날 마이클 잭슨이 잠실 주경기장에서 내가 MOU를 맺었던 바로 그장소에서 북한 어린이 돕기 공연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무혐의를 받게 된 것입니다.

98년 9월 10일 영장이 기각되고 나온 날 이재만 수행비서가 나를 평창동 청와대경호원 아파트로 불렀습니다."미국에 6개월만 가있어라 대통령께서도 당신 구속을 바라지 않았다" 이 비서는 "권노갑 고문도 나갔으니 미국에 가서 만나보고, 동병상련이아니냐. 권고문 같은 사람도 외국에 나갔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99년 9월 추석직전에 미국에 나갔습니다.

그 후에 권고문을 일본에서 만났습니다. 일본 오쿠라 호텔에서 권 고문을 만날때 샤브샤브로 저녁식사를 하면서 권 고문은 "한국에 들어가면 내가 자네의 보호막이돼 주겠네. 내 우산속에 있으소. 그럼 자네는 안심이네"라고 했습니다(그 이후 그는 권씨의 비서진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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