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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용서하십시오

50대 중반의 남자가 초췌한 모습으로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뒷목에서부터 등줄기가 뻐근하게 아프다고 호소했다. 그는 며칠째 밤잠을 이루지 못한 채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떨고있다고 했다. 회사에선 일손도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강한 배신감 때문에.

그에겐 평소 친동생 이상으로 아껴주며 배려해 온 영세 자영업자 후배가 있었단다. 물론 그가 경영하는 중견 기업에 호조건으로 거래도 하고 있었다.

덕분에 어렵게 살림을 꾸려가던 후배는 그럭저럭 기반을 잡을 수 있었고, 후배는 이를 늘 고맙게 여기고 그를 친형 이상으로 섬기며 따랐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느껴왔단다.그런데 잘나가던 그의 회사가 외환위기를 겪으며 심한 경영난에 빠졌다.

때문에 본의 아니게 그는 후배에게 거래과정에서 발생한 불가피한 피해를 주고 말았다. 그는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미안하게 생각했다.그 뒤로 후배의 태도가 돌변했다. "선배를 잘못 만나 망하게 됐다"며 주위에 원망 섞인 험담을 하며 다닌다는 걸 알게 됐다.

평소 싹싹하고 의리있으며 온순한 줄만 알았던 그 후배로부터 '등에 비수를 맞았다'는 기분이 들었단다. 그는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키워온 기업이 문을 닫게 된 고통 이상으로 견딜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배은망덕하다고 느꼈다. "어찌 세상살이가 이렇게 비정한가. 사람을 믿고 정 내어가면서 더불어 살 때 사회는 가치가 있고 세상은 살맛 나는 것인데, 이럴 수가…".

화가 나고 겹치는 서운함에 그는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고 목과 등에 강한 통증을 겪고 있었다. 진찰을 해보니 '주사놓을 병'도 '약 지어줄 병'도 아니었다.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는 길밖에 달리 처방이 없었다. 나는 그의 두 손을 꼬옥 잡아주며 말했다. "환하게 웃으며 그 못난 후배를 용서하십시오".

이시우(신경외과 전문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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