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꿈의 무대 역대 스타들

1930년 1회 우루과이 월드컵의 득점왕은 8골을 기록한 아르헨티나의 기예르모 스타빌레로 당시 그는 98년 프랑스월드컵의 '원더보이' 마이클 오언처럼 18세 소년이었다. 그러나 마이클 오언은 이미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떠오르는 스타였고 스타빌레는 고교생에 지나지 않았다.

축구가 황금알을 낳는 스포츠산업이 되기 오래전 소박한 시절을 살았던 스타빌레는 역시 고교생으로 팀 동료였던 페레이라가 학기말 시험을 봐야 한다며 집으로 돌아가자 대타로 출전, 팀을 결승에 진출시키는 맹활약을 펼치며 '스타 계보'의 첫 등록자가 됐다.

이후 많은 축구 스타들이 월드컵의 역사를 만들어가며 오늘날에 이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축구의 발전과 사회문화적 위치 변화도 이뤄지게 된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월드컵이라는 꿈과 열정의 드라마와 스타에 대한 환호일 것이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정치적으로 이용한 2회 이탈리아 월드컵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계 이탈리아 선수 레이몬드 올시는 거의 90도 각도로 꺾이는 '기적의 마구'를 동점골로 성공시켰다.

그러나 '프리킥의 마술사' 데이비드 베컴이라도 한 수 지도를 받아야 할 그의 골은 결코 재현되지 못했다. 엉뚱하게도 오른 발에 왼쪽 축구화를 신고 강한 스핀을 넣어 골을 성공시키긴 했지만 다음날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20번을 넘게 찼으나 공은 직선으로 날아갔다.

1938년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한 브라질의 레오니다스는 파라과이의 괴짜 골키퍼 칠라베르트처럼 기행을 일삼았다. 그는 폴란드와의 1회전 경기에서 비가 내려 경기장이 진흙탕이 되자 주심에게 양 팀 선수 모두 축구화를 벗고 시합할 것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진흙이 박혀 무거워진 축구화를 참다 못한 그는 결국 후반 32분부터 맨발로 뛰는 돌출 행동을 벌였고 돌출 행동에 관계없이 한 경기 최초로 4골을 기록한 선수가 됐다.

페렌 푸스카스는 54년 스위스 월드컵에 등장, 상대 팀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푸스카스 뿐만 아니라 그가 이끄는 헝가리는 당시 천하무적이어서 우승할 수밖에 없는 팀으로 통했다. 푸스카스는 '공포의 왼발'로 골 폭죽을 터뜨리며 결승전에 나아갔다.

그러나 헝가리는 브라질과의 준준결승에서 '베른의 난투극'을 벌여 팀 전력이 손실돼 서독에 2대3으로 역전패하고 말았다. 푸스카스는 56년 공산혁명 이후 스페인으로 망명, 62년 칠레 월드컵에 스페인 대표로 출전했으나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66년 홈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축구 종주국의 위상을 회복하며 우승한 영국은 보비 찰튼을 배출했다. 이 대회의 득점왕은 포르투갈의 흑표범 에우제비오였지만 보비 찰튼은 결승에서 플레이메이커와 스트라이커 역할을 함께 하며 베켄바워의 서독을 4대2로 물리쳤다.

영국은 찰튼과 함께 명 수문장 고든 뱅크스를 자랑스러워 한다. 월드컵 6경기에서 3점만 내준 그는 동시대에 활약했던 소련의 래프 이바노비치 야신과 함께 철벽 문지기로 명성을 날렸다.

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축구황제 펠레는 브라질의 세번째 우승을 이끌었다. 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이미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 알렸던 펠레는 환상적인 드리블과 슛, 패스 등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로 완벽한 존재였다. 74년 서독월드컵에서 오렌지군단 네덜란드는 혁신적인 '토털 사커'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정확한 슈팅, 날카로운 패싱 능력을 고루 겸비한 요한 크루이프는 토털 사커의 핵심으로 활약하며 현대 축구의 원형을 제시했다. 그러나 크루이프는 공격형 스위퍼와 리베로의 전형을 만들어낸 베켄바워에게 고배를 들고 말았다.

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의 마리오 켐페스(아르헨티나), 82년 스페인 월드컵의 파울로 로시(이탈리아)와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의 살바토레 스킬라치(이탈리아)는 갑작스럽게 부각, 득점왕이 됐다.

펠레에 비견되는 아르헨티나의 디에고 마라도나와 독일 전차군단을 이끌었던 로타르 마테우스는 86년 멕시코 대회와 90년 대회의 주역이었다. 브라질의 호마리우와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바조는 94년 대회에서 자웅을 겨루었다.

월드컵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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