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월드컵 본선 D조 조별리그 폴란드전에서 한국축구 역사상 첫 본선 승리를 일궈낸 거스 히딩크(55) 감독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용병술이 돋보이는 '명장'.
▶선수시절
네덜란드 비스에서 태어난 히딩크 감독은 21살 때인 1967년 네덜란드 1부 리그 그라프샤프에서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포지션은 미드필더.
이어 71-72시즌은 네덜란드 최고명문 PSV아인트호벤에 속했으나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하다 다음 시즌에 그라프샤프에 복귀했다. 76년부터는 미국으로 무대를 옮겨 워싱턴 디플로매츠, 새너제이 어스퀘이크스에서 각각 한 시즌을 보냈으며 77년에 네덜란드로 복귀했다.
NEC니메가(77년-81년)에서 활약하다 프로생활을 시작한 그라프샤프(81년-82년) 유니폼을 입고 마지막 시즌을 보냈다. 히딩크 감독은 36세까지 선수생활을 했지만 그렇게 명성을 떨치지는 못했다.
▶지도자 생활
히딩크는 은퇴와 동시에 그라프샤프구단 코치를 맡아 지도자생활에 접어든다.두 시즌을 보낸 뒤에는 PSV아인트호벤으로 옮겨 코치생활을 했고 다시 두 시즌 뒤에는 아인트호벤 감독으로 승격됐다.
히딩크 감독이 국제축구계에 이름을 올린 것은 이때부터.맡자마자 곧바로 팀을 1부 리그 정상에 올려놓은 것을 시작으로 3년연속 팀을 네덜란드 리그 정상에 올려놓았다.
특히 88년에는 네덜란드 리그와 FA컵, 유럽 챔피언스 리그 등 3개 타이틀을 동시에 석권해 단숨에 세계적인 지도자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터키 페네르바제(90-91)를 거쳐 91년 스페인 발렌시아 클럽 감독을 맡았으나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95년 네덜란드 대표팀 사령탑을 맡은 히딩크 감독은 96유럽선수권에서 네덜란드를 8강으로 이끌었으며 98프랑스 월드컵에서는 4강 진출 당시 한국대표팀에게 0대5의 뼈아픈 패배를 안겨 차범근 감독을 중도하차시켰다.
히딩크 감독은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98-99) 감독으로 남미-유럽 클럽축구 최강전인 98도요타컵 우승을 차지했으나 스페인 리그에서 2위에 그치자 트레이드 실패 등의 책임으로 사령탑에서 물러났고 2000년 상반기에는 3개월 계약으로 레알 베티스 감독을 맡기도 했다.
▶한국에서 재기 시도
거칠 것이 없을 것 같았던 지도자 인생에 일단 제동이 걸린 히딩크 감독에게 한국 축구대표팀을 맡아 달라는 요구가 접수됐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잘 모르던 히딩크 감독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조언을 받은 뒤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재기하기로 마음먹고 2001년 1월 부임했다.
체력과 스피드를 바탕으로 화끈한 공격축구를 지향하는 히딩크 감독은 평가전 성적이 부진할 때마다 비판을 받으면서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 한국 대표팀의 전력을 상승시키는 데 성공, '월드컵 첫 승'의 숙원을 풀었다.
히딩크는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를 의미하는 '멀티플레이어'와 스트라이커의 예리한 골감각을 의미하는 '킬러 본능' 등 새로운 유행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또 엄격한 감독의 이미지 외에도 특유의 장난기 넘치는 말솜씨와 젊은 연인 엘리자베스와의 각별한 관계 등으로 화제를 뿌리면서 히딩크는 지난 1년 6개월간 한국인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인물 중 하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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