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의미도 뜻도 잘 모른 체 그냥 따라 불렀던 유행가가 있었는데 그것이 '봄날은 간다'였다. 지금도 모임의 뒤풀이에서 노래를 불러야 할 처지가 되면 나는 서슴없이 이 노래를 부른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이 노래는 나의 18번이 되었다. 마음이 울적해도 이 노래를 부르고, 신나는 일이 있어도 이 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오게 된다. 기분이 좋을 때는 '봄날'이라는 그 말에 취할 수 있었고, 우울할 때는 '간다'라는 말의 애잔함에 마음을 맡길 수 있었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그 시절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대부분 다 힘들었는데, 그 때는 봄이라도 어서 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개나리의 노란색이며 진달래의 연분홍도 등록금 미납으로 학교 교실에 들어갈 수 없었던 그 슬픔만은 해결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봄날이면 유달리 배고픔도 더해지는 것 같았다. 물론 힘들었던 계절이 비단 봄날만은 아니었다. 여름이나 가을, 겨울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봄날은 고통의 첫 시작이자 그 연속의 전령사였다. 고통의 계절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결국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 날리더라--'라는 가사를 소리 높여 부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마치 기원 의식을 치르듯이, 무슨 주문이라도 외우듯이 그렇게 불렀는데 특히 중간 부분의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우는…'이라는 구절에는 눈물까지 흘리기도 했다. 그렇게 한바탕 그 노래를 부르면 힘든 현실도 결국은 지나고 말것을, 그리고 돌아오는 계절에는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만들 수 있었다.
3김 중 한 분과의 첫 번 째 조우도 그 시절 봄에 이루어졌다. 가정교사 자리를 얻기 위해 구직광고를 내려고 어느 신문사 현관을 들어섰을 때 예의 3 김 중 한 분과 맞닥뜨렸다.
신문에서 사진으로만 보았던 분이었다. 그 때는 가정교사 자리가 급했기에 나는 길을 비키는 예만을 치렀다. 그런데 바로 그 3김이-물론 김종필씨는 뒤에 3김 대열에 합류했지만- 우리 세대 전 기간의 정치를 볼모로 잡을 줄이야 어찌 짐작이나 했을까!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면서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3김의 정치 보스 활동은 그로부터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그리하여 한 때는 이 땅의 민주주의는 양 김에 의해 이루어 질 것이라는 믿음까지 심어 줄 정도였다. 양 김이 곧 민주주의요, 양 김이 바로 미래인 것처럼 그렇게 주창될 정도였다.
그러나 양 김이 가져다 준 오늘의 우리 정치는 결국 허망함 그 자체뿐이다. 민주화의 오랜 정치 투쟁은 결국 그들 스스로가 대통령이 되는 것으로 귀결되어 버렸다. 그들이 대통령이 되어도 달라진 것이 없는, 여전히 등록금으로 우는 젊은이가 있고 생활고에 고생하는 이웃이 있으며, 사람다운 삶의 가치는 '봄날'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3 김 때문에 얻은 것이 있다면 '가신정치'라는 이름의 패거리요, 무슨 고등학교를 들먹이는 그 좁쌀 같은 연고주의요, 끝이 없을 정도로 폭로되는 부패 망국이다.
언제쯤이면 이 땅에도 참 '봄날'이 찾아올까? 사람처럼 살 수 있기 위해서도 오늘 우리는 참 많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통일도 이루어야 하고 정의로움도 실현해야 한다. 정경유착의 추악함도 단절해야 한다. 평등도, 평화도, 인격적 자아도, 그리고 공공성도 자리잡아야 한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부패도 없애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먼저 3김의 패거리를, 3김의 극단적 연고주의를, 3김을 흉내내는 천박한 정치 술수부터 철저히 몰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절대로 우리에게 참 봄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하기야 세월이 만능인지, 어느 새 3김도 조락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기에 나도 요즘에는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우는/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를 소리 높여 노래하고 있다.
그러다 보면 내 스스로도 3김과 함께 떠내려가고 있음을. 3김이 걸어 놓은 정치적 주술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스러움을 지닌 체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그렇지만 3김과 그 3김에 물든 나 같은 사람들이 떠내려가는 것은 다음 세대에게는 더할 수 없는 기여일 수 있다는 사실에 한 가닥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나는 온갖 회한을 지닌채 '봄날은 간다'를 노래 부를 수밖에 없게 된다.
진덕규(이화여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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