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대구시 수성구의 한 식당에 중년 주부들이 모였다. 여고 반창회. 이날 모인 주부 14명 중 6명은 최근 2,3년 사이에 새 일을 시작한 사람들이다.식당, 보험업, 레스토랑, 옷가게 등.
직장을 가지지 않은 주부들도 나름대로 취미를 갖고 있었다. 야생초 재배, 붓글씨 쓰기, 사진, 노래강습 등 각양각색이었다. 이들 주부들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남편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성공했고 자녀들은 대학에 입학했거나 대입을 준비하고 있다. 또 20여년 전업주부 생활 외에 특별한 경험이 없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들이 새 사업을 구상했을 때 남편들의 반대가 심했다는 것도 똑같다.
사회적 경험이 일천한 이들의 사업은 대부분 전망이 밝지 않았다. 그러나 실패의 암울한 그림자에도 불구하고 주부들은 활기에 차 있었다. 곁에서친구의 고전을 지켜보면서도 일을 갖지 못한 주부들은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큰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내 일을 갖고 싶었다". "종일 아무도 없는 집에 있자니 미칠 것 같았다". "이게 내 인생의 전부인가 싶었다". 사회적 경험이거의 전무한 주부들이 뒤늦게 일을 시작한 이유는 근거도 없이 솟아나는 허탈감과 짜증을 삭이기 위해서였다.
지난 60, 70년대 미국의 여성 운동가 베티 프리단은 자신의 책 '여성의 신비'를 통해 중년 주부들의 공허감과 불안의 근원을 설명하고 있다. 프리단은 미국 여성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자아성장이 차단된다고 했다. 미국 사회에 퍼져 있는 '현모양처' 이데올로기가 여성의 자아성취 욕망의 싹을 자른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는 전문직으로 나아가려는 여성에게 '나는 아내로서, 엄마로서 임무를 다하지 못했고 결국 불안한 인간이다'라는 인식을 갖게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업주부들의 사정도 미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독립된 인간으로 성장이 차단된 여성들은 남편과 아이들을 통한 대리인생을 살아간다. 남편의 사회적 성공과 아이들의 학업성취가 주부들의 인생인 것이다.
그러나 자녀들이 독립하고 바쁜 일상에 지친 남편이 아내에게 무관심해질 때쯤인 중년에 이르러 주부들은삶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난 껍데기뿐이다"고 한숨쉰다. 자기 스스로 이루어낸 것이 없다는 인식에서 생겨난 한숨이다.
'프리단의 자'를 갖다대면 중년 여성들이 뒤늦게 일을 갖고 싶어하거나 춤바람, 도박, 세칭 묻지마 관광, 마약 등에 빠지는 것은 자기확인 과정에 다름 아니다.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지위와 의무를 강요해온 우리사회의 가부장적 분위기에 순응했던 그녀들이 마침내 자신의 의지에 따른 삶의 운용에 도전하는 것이다.
프리단은 "여성을 인간이 아니라 주부로 만들기로 선택한 사회는 병들거나 미성숙한 사회일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을 성적(性的) 특성에 묶어 둔 채 비인간화하려는 시도는 확실히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불행하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여성이라면 작은 가게라도 열겠지만 그렇지 못한여성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흔해빠져 이제는 신문 사회면의 가십거리도 못되는 늦바람, 묻지마 관광, 도박 등 중년 주부의 일탈은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강조해온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인지도 모른다. 주부들이 괴물을 키워내기 전에 그녀들을 풀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댓글 많은 뉴스
"탄핵 반대, 대통령을 지키자"…거리 정치 나선 2030세대 눈길
젊은 보수들, 왜 광장으로 나섰나…전문가 분석은?
민주, '尹 40% 지지율' 여론조사 결과에 "고발 추진"
윤 대통령 지지율 40%에 "자유민주주의자의 염원" JK 김동욱 발언
"尹 영장재집행 막자" 與 의원들 새벽부터 관저 앞 집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