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하는 오후

어린 딸은 오늘도

제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집은 조용했고

아내는 아직 시장에서 오지 않았다

아빠, 하고 부르며

가끔 아이는 혼자가 아님을 확인했고

그 때마다 옆방에서

나는 부드럽게 응, 하고 대답했다

보이지 않아도

어떤 굳센 힘이 서로를 묶어 놓았고

아이는 다시 안심했다

그래, 우린 혼자가 아니야!

귀를 열고 소리치면

저 숲과 바람도 따스한 응답을 보내 줘

어느 휴일의 저물녘

어린 딸애와 신호를 주고받으며

작은 하나를 깨달았다

-이진엽 '뜨거운 신호'

누구나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상의 한 단면을 시로 형상화했다. 그래서 어려울 게 없는, 잔잔하면서도 감동을 주는 시이다. 아버지와 딸 사이에 오고간 이 무언의 '어떤 굳센 힘'의 정체는 무얼까?

그리고 어린 딸애와 신호를 주고 받으며 시인 자신이 깨닫게 된 '작은 하나'의 의미는 또 무엇일까? 그것은 가족간의 넉넉한 신뢰일지 모른다. 아니 그것보다 더 원초적인 어떤 본능적 감성일지도 모른다. 가족해체의 시대에 따뜻하게 읽히는 시이다.

김용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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